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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외교 논쟁 사라진 미국 대선

중앙일보 2012.03.26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크리스토퍼 힐
미국 덴버대 국제대학원장
전 주한 미 대사
미국의 2012년 대선은 미 국민과 그 지도자들이 외교정책의 구체적인 사안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후보 토론회가 아무리 회를 거듭해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도전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실 구체적인 외교 현안을 거론하지 않는 후보가 더 무게 있어 보일 수 있다. 초반 경선전에 뛰었던 존 헌츠먼 전 주중대사가 중국을 다루는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며 관련 지식을 과시하고 몇 마디 중국말로 자신의 어학 실력을 보여줬을 때 다른 후보들은 조롱으로 대꾸했다. 외교적 식견이 대선후보가 되는 데 되레 방해가 됐는지 그는 곧 후보군에서 탈락했다. 대선 경선에 나선 후보들은 외교정책과 관련해 그저 자신의 감성적인 부분만 나타내면 될 뿐 구체적인 지식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구체적인 미 외교정책이 자신들의 삶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 밖의 세계는 유일 강대국 미국의 국민이 외교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으로 여긴다. 영화 ‘하이눈’에서 겁쟁이 마을 주민 사이에서 외롭게 악당에 맞서는 보안관 역할을 하던 게리 쿠퍼나, 영화 ‘리오 브라보’에서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을 모아 악당에 맞서는 존 웨인처럼 말이다.



 미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종종 미국인들이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애국적인 국민이라고 말한다. 과거 미국인은 국경일에만 집에 성조기를 게양했다. 평일에는 정부 청사에서만 성조기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1년 내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자동차 판매 대리점에선 심지어 수입차를 팔면서도 이를 게양할 정도다. 게다가 지난 수십 년간 야구 경기에선 경기 시작 전 국가만 불렀다. 하지만 지금 팬들은 경기가 3분의 2 정도 지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인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도 부르도록 요청한다. 이 같은 현상은 2001년 9월 11일의 테러 공격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애국주의 열기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테러보다 더 강력한 힘이다. 미국 밖에서는 미국의 본심을 몰라준다는 서운한 감정 말이다. 인기 컨트리송의 후렴구 가사가 그런 감정을 잘 나타낸다. “나는 미국인임이 자랑스럽다/ 여기서는 적어도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까.”



 적어도? 미국은 지식기반 경제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최고의 생활 수준을 누려왔다. 자유는 그러한 성공의 바탕이었다. 오늘날에도 미국 경제체제는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런 미국이 최근 힘이 빠지고 있다. 나는 이라크에서 선거 옵서버로 참가했던 한 미국인의 우울한 얼굴을 기억한다. 텍사스 주의회 의원인 이 옵서버는 이라크 관리에게 “미국이 민주주의를 도입해준 데 대해 무엇으로 보답하려 하느냐”고 물었는데 그 관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옵서버는 낙담했는지 그 자리에서 나가버렸다.



 올해의 미 대선 토론은 후보들이 외교적 과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적인 바탕이 있는지를 묻기보다 이를 다루는 데 필요한 정신력이 있는지만 따지고 있다. 지적인 부분이 아니라 감정적인 부분에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미 정치사에는 국제 정세를 쥐락펴락한 대통령이 적지 않다. 존 F 케네디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을 처음 만났을 때 미국의 정보력과 담력을 보여줬다. 그러자 미국의 젊은 대통령을 애송이라 여기고 얕봤던 소련 지도자는 미·소 간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장거리 핵미사일의 쿠바 배치 계획을 철회했다. 현재의 미국 대선전에선 과거의 이런 에피소드나 거론하며 외교 관계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지식과 결단을 살피지 않고 배짱 테스트나 하고 있는 게 고작이다. 전 세계가 지금 미 대선 경선 후보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덴버대 국제대학원장 전 주한 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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