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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다칭의 ‘메뚜기’들

중앙일보 2012.03.26 00:00 종합 38면 지면보기
한우덕
중국연구소 부소장
학교 운동장에도, 아파트 정원에도, 공원 벤치 옆에도, 심지어 유치원 마당에도…. ‘메뚜기’들은 곳곳에서 도시를 ‘습격’하는 듯했다. 모양이 메뚜기와 닮아 속칭 ‘메뚜기’로 통하는 석유시추 펌프(서커로드 펌프)가 그 실체. 중국 최대 석유 도시인 헤이룽장(黑龍江)성 다칭(大慶) 취재는 이들과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석양과 어우러져 다칭 하늘을 수놓고 있는 메뚜기의 실루엣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시정부 관계자의 안내로 방문한 ‘철인 왕진시(鐵人王進喜) 기념관’. 유전 개발 초기 공을 세운 노동자 ‘왕진시(王進喜)’의 이름을 딴 석유 관련 전시관이다. 전시물 중 ‘공업독립(工業獨立)’이라는 구호가 눈길을 잡는다. “소련으로부터의 경제 독립을 상징하는 구호였다”는 게 안내원의 설명이다. 유전이 발견됐던 1959년은 중·소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이듬해 소련은 중국 파견 기술자들을 전원 철수시켜 중국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다칭 유전은 분위기 반전을 위한 ‘공업 독립’ 선전에 동원됐고, 탈(脫)소련을 대표하는 도시로 등장했다.



 지금은 반대다. 다칭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 협력을 상징하고 있다. 러시아 석유 덕택이다. 다칭에는 한 해 약 1500만t 규모의 러시아산 원유가 공급되고 있다. 다칭 생산량의 약 40%에 달하는 규모로 2009년 양국 협약에 따라 앞으로 20년 동안 계속된다. 탈 소련의 도시 다칭이 러시아 석유의 수입 창구로 변한 것은 아이러니지만, 경제상황이 부른 엄연한 현실이다. 93년 원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된 중국은 현재 소비의 62.5%를 수입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중국은 상대가 어디에 있든, 어떤 체제의 나라든 그곳에 석유만 있으면 달려간다.



 다칭으로 올 석유는 아니었다. 90년대 초 중국과 일본은 러시아 석유를 들여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일본 승리. 일본이 월등한 경제력을 앞세워 동시베리아 송유관을 다칭이 아닌 러시아 동부 나홋카로 끌어온 것이다. 그러나 끝난 게 아니었다. 절치부심 경제력을 쌓아온 중국이 2000년대 들어 송유관 루트 변경 작전을 펼쳤고, 결국 2009년 ‘인터셉트(중간 가로채기)’에 성공했다. 당시 중국이 러시아에 제공한 돈이 무려 250억 달러였다. 또 다른 ‘게임’이 진행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되는 가스관 건설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 “베이징까지 온 러시아 가스를 서해를 통해 한국으로 공급하면 어떻겠느냐”는 중국석유천연가스(CNPC)의 최근 제안에서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아시아 지역으로 원유·천연가스 수출을 다각화하려는 러시아, 좀 더 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중국·일본·한국. 다칭의 러시아 석유는 이들이 벌이는 복잡한 ‘에너지 전쟁’을 상징하고 있다. 다칭 상공의 ‘메뚜기’들을 낭만적인 풍경화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다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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