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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 총리 “느리지만 움직이면 멈추지 않는 코끼리, 그게 인도다”

중앙일보 2012.03.23 01:24 종합 1면 지면보기
만모한 싱 인도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 총리 관저에서 본사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싱 총리는 “한국의 더 많은 기업이 들어와 인도의 거대한 시장과 젊고 유능한 노동력을 활용하라”며 한국 기업의 인도 진출을 당부했다. [뉴델리=김경빈 기자]


인도 총리 만모한 싱(Manmohan Singh·80·사진) 박사는 자기의 조국을 코끼리로 표현했다. 대륙적 크기의 영토와 중국과 맞먹는 12억 인구, 인더스 문명의 영혼이 스며든 이 나라는 오랫동안 거대한 몸집으로 잠자고 있었다. 국민의 삶의 질이란 측면에서 잠자는 코끼리를 깨운 건 싱 총리였다. 19일 영국식 정원이 고즈넉한 뉴델리 총리 관저에서 만난 싱 총리. 그는 “인도는 코끼리 같다. 처음 움직이는 게 느리지만 일단 움직이면 누구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핵안보정상회의 참석하러 내일 서울 오는 싱 인도 총리
“거대 시장에 우수한 노동력 … 한국기업, 인도로 오세요”



 사회주의적 자주경제를 고집하던 인도는 싱 박사가 재무장관이 되던 1991년 시장 개방과 경쟁력 강화로 국가 노선의 대전환을 꾀했다. 싱이 총리가 된 2004년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개혁’이 진행됐다. 인도 경제의 최근 10년간 연평균 성장률 6%는 이 나라가 중국에 이어 세계 최대 성장국가임을 보여주고 있다. 핵안보정상회의 참석차 24일 방한하는 싱 총리에게 중앙일보가 인터뷰를 요청한 건 세계 둘째 성장국가를 이끄는 그의 리더십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으로 국가 노선을 전환할 때 총리께선 강력한 저항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저항을 어떻게 돌파하셨습니까. 어떤 저항이 가장 힘드셨습니까.



전영기 본사 편집국장이 19일 인도 뉴델리 총리관저에서 싱 총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뉴델리=김경빈 기자]
 “인간에겐 현상유지(status quo)의 본성이 있습니다. 현상유지는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아주 편안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꾸려 할 때 저항이 있는 건 편안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나는 조국과 국민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게 개혁 저항을 극복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91년 이래 국민회의당을 중심으로 수많은 정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인도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치적 변동들이 경제개혁의 프로세스에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개혁·개방·자유화 정책에 대해 거대한 국민적 합의가 저변에서 형성됐던 거죠.”(※내각책임제인 인도의 제1 당은 국민회의당인데 여러 정당과 이합집산하며 연정을 하고 있다. 싱 총리의 당적은 국민회의당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석사,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다.)



-국민회의당의 실권자는 당 대표인 소냐 간디(Sonia Gandhi ·66) 여사입니다. 성도, 종교도, 출신 지역도 다른 간디 여사와 함께 어떻게 8년간 국정을 이끄셨습니까.



 “인도인은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 왔습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한계가 아니라 강점으로 여깁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들은 법에 의한 통치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경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한국의 어제와 오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1929년 ‘동방의 등불’이란 시에서 ‘코리아, 등불이 켜지면 동방을 밝힐 것이다’고 썼습니다. 대한민국은 두 세대(60년) 만에 활기찬 민주주의, 빠른 경제성장, 혁신의 발전소가 되어 아시아 전체에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인이 오늘날의 평판과 지위를 얻기 위해 국가건설 과정에서 겪었던 고통과 희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모습엔 선견지명 있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한국인의 결단이 투영돼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번영의 요인입니다.”



 기자는 싱 총리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서울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받은 안부 메시지를 전했다. 싱 총리는 “이 대통령은 나와 가장 절친한 지도자이며 우리가 2010년 공화국 선포일 때 주빈으로 초대한 분이다”고 화답했다.



 -서울의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면 어떤 말씀을 나누시겠습니까.



 “친구인 이 대통령과 나는 한국과 인도의 포괄적 동반자 협정(comprehensive partnership agreement)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면 동반자 관계에 실질적 내용을 부여하는 얘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양 국민의 교류 확대가 중요합니다. 지역 안보와 국제적 악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핵안보와 안전을 증진시키는 공동의 노력에 대해 대화할 것입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인도가 국제사회의 두 강국인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 편을 들 것을 요구받는 일에 직면한 적은 없습니까.



 “중국은 인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의 가장 큰 이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기도 합니다. 인도와 미국의 관계 개선은 2005년에 이뤄졌습니다. 인도 사람 300만 명이 살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가장 큰 비즈니스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두 나라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겁니다. 친미와 친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죠. 거대하고 역동적인 중국 같은 나라는 어떤 나라에 의해서도 봉쇄될(contained) 수 없을 것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인도 정부의 부패와 관료적 규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포스코도 오리사 주에서 제철소 건설이 6년간 지연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만.



 “외부 관찰자들은 종종 편협한 시각을 표출합니다. 인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한 개방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부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을 고려하는 민주적 절차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사업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포스코 문제는 여러 이해당사자들이 만족할 만하게 곧 해결될 것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인도엔 300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습니다. 우리는 철도·공항·발전·교통시스템 등 인프라 건설에만 향후 5년간 1조 달러를 투자할 예정입니다. 부디 한국의 더 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인도의 거대한 시장과 젊고 유능한 노동력을 활용하시길 바랍니다. 인도의 기회는 활짝 열려 있습니다.”



 인도 정부의 관리들은 12억 인구 중 구매력 있는 중산층을 3억 명으로 보고 있다. 빈부격차가 크다 해도 시장은 넓다는 얘기다. 인도의 가전(家電)시장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아이템별로 50~7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소형차가 대세인 승용차 시장에선 현대차가 스즈키(50%)에 이어 20%로 부동의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한물 간 경제학자일 뿐”이라고 겸손해하는 싱 총리에게서 느껴진 건 산전수전 다 겪은 경세가(經世家)의 면모였다. 80세 노인의 표정은 따뜻했고 뿔테 안경 넘어 이성의 빛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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