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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미국 농락하는 북한

중앙일보 2012.03.23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북한식 합의 따로, 한·미식 합의 따로’. 지난 수십 년간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따로국밥’식 합의다. 거의 모든 합의가 처음에는 창대했으나 얼마 안 돼 유야무야되는 것이다.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합의된 지 하루 만에 결렬됐던 ‘9·19성명’이 대표적인 사례다. 쌍방이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논의키로 되어 있던 ‘경수로 제공’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고 북한이 말을 바꾼 것이다. 1985년 8월 평양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 기간 중에 터졌던 ‘모란봉경기장 총칼 매스게임 사건’도 마찬가지다. 당시 남북 양측은 ‘시찰 중에 체제 선전은 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으나, 북측은 ‘청소년 무용’을 보여주겠다면서 남측 대표단을 모란봉경기장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인민군 복장의 학생들이 총검술을 하며 미군 복장의 상대방을 총검으로 찌르는 모양의 매스게임을 연출했다.



 반면에 남측이 어설프게 처리해 북한으로 하여금 다른 소리를 내게 빌미를 준 경우도 있다. 1972년 남북 7·4공동성명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넣은 것이 대표적 경우다.



 40년 전 벌어졌던 ‘합의와 파기’ 양상이 이번엔 제3차 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재현됐다. 미국은 북한에 영양식 제공, 북한은 장거리미사일 발사, 우라늄 농축활동 임시중지, 국제원자력기구 사찰 허용에 양측이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보름 만에 광명성 3호 발사를 발표했다.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공위성 발사는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다른 것’이며, ‘북·미 합의와는 별개’라는 억지를 부렸다. 글린 데이비스 미국 측 대표가 협상장에서 김계관 북한 대표에게 ‘인공위성 발사도 합의 위반’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말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북한이 이번에 합의를 위반한 것은 그렇게 해도 사태를 헤쳐나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협상기술적인 면에서 합의문에 ‘인공위성’이라는 표현이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 인공위성 발사가 합의위반이라는 것은 미국 측 대표가 말로 했던 것이지, 합의문에는 포함돼 있지 않기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고집을 피울 수 있다.



 북한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정세가 악화되는 것은 자신의 대선전략에 불리하다고 판단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분명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특히 이란 핵 문제가 초미의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현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북한은 또 중국에 대해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들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미·중이 당분간은 반발하다가 발사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대화 분위기로 돌아올 것이라는 게 북한의 계산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북한의 정책 우선순위 1위는 김정은 체제의 안착이다. 주민들에게 약속해 온 ‘강성대국 진입’의 해에 걸맞은 상황도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식량 확보와 군사적 행사가 적격이다. 북한은 이번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 두 가지를 다 얻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국을 농락해서라도 말이다.



 북한의 의도가 이렇다면 한·미엔 ‘단호한 대처’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다. 특히 북한의 합의 위반을 지나치게 부각시킬 필요도 없다. 북한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경고하면서 영양식 제공 중지 등 각종 제재조치를 검토해야 한다. 다만 이런 대응이 북한을 ‘개과천선’시킬 수 있다는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 만에 하나 중국의 압력으로 북한이 발사중지로 돌아선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국으로선 미국과의 공조에 틈이 나지 않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선 대개 공조의 틈이 벌어지곤 해왔다. 그런 일이 재연돼선 안 된다.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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