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욕 진출한 유명 디자이너, 이마트로 간 까닭

중앙일보 2012.03.23 00:00 경제 4면 지면보기
다음 달부터 이마트에서 판매될 자신의 옷 앞에 디자이너 최범석씨가 앉았다. 그는 “디자이너 옷을 할인점에서 팔면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할인점의 가치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사진 이마트]


“내가 맞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조인성 옷 디자이너, 대형마트로 간 까닭
동대문 출신 최범석, 이마트와 손잡다



 디자이너 최범석(35)씨는 단호했다. 그는 2008년부터 뉴욕 컬렉션에 매 시즌 무대를 올리고 있는 디자이너다. 2006년엔 파리의 프랭탕, 르 봉 마르셰 백화점에 들어가면서 세계 패션 수도에 깃발을 꽂았다. 그의 옷은 배우 권상우·조인성·류승범이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음 달 5일부터 그가 만든 옷이 이마트에서도 팔린다. 티셔츠·점퍼·청바지 등이 ‘W.DRESSROOM’이라는 최씨의 브랜드를 그대로 달고 이마트 43개 점포에 들어가는 것. 이마트에 들어가는 상품은 따로 디자인해 생산한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인점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다.



 가격도 낮췄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매장에선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티셔츠는 5만9000원에서 12만원, 청바지는 9만8000원에서 17만원까지 한다. 파리 프랭탕 백화점에선 재킷 하나에 30만원대. 하지만 이마트에선 티셔츠 1만9000~2만9000원, 청바지는 5만9000원쯤이다. 이마트를 위한 1차 생산량은 3만4000장. 디자이너로선 파격적인 가격과 물량이다.



 최씨는 “타협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디자이너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내가 옳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라고 덧붙였다. 디자인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손잡고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야 한다는 뜻이다. “다 동대문에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세부터 동대문에서 일했다. 서울 위례상고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졸업하며 생각해보니, 멋 부리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홍대 인근 길거리에서 옷을 팔았다. 하지만 자본금 100만원을 모두 날리고 동대문으로 들어갔다. 원단부터 나르며 옷을 배웠고 21세에 ‘무(MU)’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다(무·無)는 뜻이었다.



 “프라다·페라가모가 원단 이름인 줄 알았다”는 그에겐 패기밖에 없었다. 매일 새벽부터 나가 오전엔 원단 가게와 생산 공장을 돌아다녔다. 동대문이 문을 여는 오후엔 전국에서 온 상인들을 만났다. “바닷가 사람들은 살갗이 그을려 강렬한 색을 좋아한다는 걸 전라도 상인에게서 들었다”고 기억했다. 이렇게 배운 까닭에 그에게 패션은 ‘작품’이 아닌 ‘생활 수단’이었다. 2003년 동대문 출신 최초로 서울 컬렉션에 진출할 때부터 최씨는 이단아였다. 그의 옷은 기존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달리 이해하기 쉬웠다. 최씨는 “TV에 김연아가 나오면 ‘동계올림픽’을 주제로 디자인을 시작하는 식이다. 어려운 패션 철학 같은 건 없다”고 설명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는 게 최씨의 생각이다. 2008년 첫 뉴욕 컬렉션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쇼를 하면 관객 1500명이 들어오고 300명은 밖에서 대기했던 때다. 뉴욕에 갔더니 딱 200명 있었다.” 당시 그는 판매가 좀 어렵더라도 쇼의 시작과 끝엔 강렬한 작품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대문에서 배운 걸 잠시 잊었던 거다. 실패를 경험하고 바로 뉴욕 번화가에 가서 사람들 옷 입은 걸 일일이 기록했다.” 인종·나이·성별로 나눠 분석한 뒤 뉴요커의 취향을 찾아내려 애썼다. “사람들이 실제로 입는 옷을 알고 나서 만든 옷이 인정받았다.” 동대문에서 배운 것으로 뉴욕에서도 살아남은 셈이다. 그는 이제 보통 사람에게 팔 수 없는 옷은 무대에 올리지도 않는다는 생각으로 디자인한다. 마침 이마트도 디자이너 브랜드 입점을 1년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최씨는 디자인뿐 아니라 생산까지 책임지기로 했다. “동대문에서 한 가지 스타일의 티셔츠를 10만 장까지 팔아봤다. 못 할 게 뭔가.” 그의 생각은 출발 지점인 동대문으로 다시 돌아가 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