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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대모로 큰 유랑극단 아기…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김성녀

중앙일보 2012.03.22 04:30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국립창극단 신임 예술감독 김성녀.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아 설렌다”고 말했다. 그는 1978~80년 국립창극단원이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걷기 시작하면서 아역 배우로 창극 무대에 올랐다. 그 후 육십 평생을 무대에서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며 살았다. 3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켜온 마당놀이. 그리고 150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ㆍ영화ㆍ드라마 …. 팔방미인 여배우에서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된 김성녀를 만났다.


박귀희 선생 “박옥진 딸이면 말할 것도 없다” 문하생으로 받아줘

“먹고 살기 위해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는 이제 창극 대중화와 정체성 확립이란 숙제 앞에 서있다.



창극을 하는 예인의 딸로 태어나 돈으로 환산 못할 재능을 유산으로 받았다. 연기뿐 아니라 판소리와 가야금, 노래와 춤에 타고난 끼가 있다. 특히 대사 전달력을 뜻하는 ‘딕션’ 부문에선 당대 최고로 꼽힌다. 30년 동안 마당놀이의 여주인공으로 총 500만 명의 관객을 울리고 웃겼다. 환갑 나이에 연극계 최고 영예의 상으로 치는 ‘이해랑 연극상’을 받았고, 지난 12일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됐다. 중앙대 음악극과 교수이자 극단 미추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성녀(62). 어머니를 따라 서너 살 때부터 창극 무대에 섰던 그가 창극 대모가 되기까지 그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엄마는…”과 “먹고살기 위해”였다. 그의 어머니가 갖췄던 재기(才氣)와 배고픈 연극 무대를 지키며 가정과 극단을 꾸려 낸 생존 능력. 이 두 가지야말로 대배우 김성녀를 만든 원동력이자 국립창극단의 수장 김성녀가 발휘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선임된 지 꼭 사흘째 되는 날 김성녀를 서울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무대 위가 더 익숙한 그가객석에 앉았다.이 객석이 꽉 차도록 창극을 부흥시키는 게 김성녀의 새 임무다.


엄마 의상 바구니 속에서 잠자던 아기



-어머니 박옥진(1935~2004)씨는 1950~60년대 여성 국극의 주인공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유랑극단의 배우였던 엄마를 온 가족이 따라다녔다. 엄마의 의상 바구니가 내 잠자리였고, 걷기 시작하면서 아역 배우로 무대에 섰다. 엄마는 굉장히 성실하고 엄격한 분이었다. 난 한번도 엄마가 마사지를 하거나 매니큐어 바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틈만 나면 공연 연습을 하셨다. 또 ‘한량’인 아버지(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김향·1921~99)에 대한 순정도 한결같았다. 사람들이 엄마더러 ‘열녀’라고 했고, ‘국악계의 춘향’이라고 했다.”



 -집의 기둥 역할을 했던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늑막염에 걸려 쓰러졌다. 6남매의 맏이인 내가 엄마를 대신해 가계를 책임져야 했다. 바로 밑 동생 성애(58·판소리 명창)와 민요 듀엣 ‘비둘기 시스터즈’를 결성, 돈을 벌었다. 당시엔 가수를 아주 하찮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 대접 받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가야금병창 명인 박귀희(1921~93) 선생을 찾아갔다. ‘네 엄마 재능을 보면 너는 말할 것도 없다’며 흔쾌히 전수생으로 받아 주셨다.”



처음 만난 손진책 주연 제의 “이거 사이비 극단 아니야”



-남편(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만난 것도 어머니 덕 아닌가. “76년 극단 ‘민예’ 연출자였던 남편을 처음 만났다. 연극 ‘한네의 승천’ 여주인공을 물색 중이었는데, 판소리 명창 김동애(1948~84) 선생이 나를 추천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이 ‘박옥진 딸이라면 무조건 주연감’이라며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더라. 고향 영주에 살 때 우리 엄마의 공연을 봤다는 것이다. 사실 그때 손진책씨가 나를 보자마자 주인공을 하라고 해서 ‘이거 사이비 극단 아니야’ 의심했던 기억이 난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엄마는 공부에 대한 욕심도 많으셨다. 고졸인 나를 보며 ‘우리 성녀, 공부시켰으면 크게 됐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하셨다. 내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 강단에 섰을 때 엄마가 참 좋아하셨다(※김성녀는 90년 단국대 국악학과를 졸업했다. 95년 중앙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중앙대에 국악대가 생기면서 전임교수가 됐다).”



1 어린 시절의 김성녀 (오른쪽). 사촌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2 김성녀·손진책 부부. 9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찍었다.


 -77년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다. 스스로는 어떤 엄마였나. “따뜻한 엄마 노릇을 못 했다. 칭찬을 자꾸 하면 아이들이 약해질 것 같아 집에서도 엄격한 선생 노릇을 했다.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기보다는 ‘이렇게 해. 이게 맞아. 이게 성과 있어’라며 내 의견을 강요했다. 아이들 마음을 따뜻한 부모의 정으로 채워 주지 못하고 가슴에 응어리를 남긴 게 참 후회스럽다. 뒤늦게 깨닫고 아이들에게 ‘사랑한다’ ‘너, 최고다’ 칭찬하고 격려하기 시작한 지 이제 3~4년이 됐다. 딸 지원(35)이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현재 몽골에 가 있고, 아들 지형(33)이는 극단 미추에서 조연출 일을 하고 있다.”



 -이제 국립창극단을 이끄는, 단체의 ‘엄마’가 됐다. “창극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가장 큰 과제다. 아직 창극을 못 본 사람이 너무 많다. 창극의 대중화를 위한 아이디어도 짜내야 한다. 그러려면 국립창극단이 단원들에게 즐거운 직장이 돼야 한다. 단원들부터 서로 화합하고 조화를 이뤄야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엄마 리더십’이 아닌가 싶다. 사랑하고, 인정하고, 격려하는 리더십이다. 사실 과거엔 내가 학교에서 무서운 선생이었다. 별명이 ‘쌍칼’ ‘독사’였다. 그러다 따뜻한 엄마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학교에서도 부드러운 선생으로 바뀌었다. 이젠 별명이 ‘성녀 마리아’라고 한다. 그렇게 창극단에서도 단원들의 마음을 얻어 가며 운영하면 잘되지 않겠나.”



3 뮤지컬 ‘최승희’. 김성녀는 2003년 이 작품을 위해 두 달 동안 몸무게를 7㎏나줄였다고 한다. 4 마당놀이 ‘홍길동전’. 5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김성녀가 1인 32역을 한다.


“관객 안 오면 어쩌나” 마당놀이 30년 늘 조마조마 



-경력이 화려하다. 76년 데뷔해 연극과 마당놀이뿐 아니라 TV 드라마(88년 SBS ‘토지’, 95년 KBS2 ‘서울뚝배기’ 등), 뮤지컬(85년 ‘돈키호테’, 95년 ‘7인의 신부’ 등), 영화(2000년 ‘춘향뎐’) 등 작품활동을 많이 했다.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다. 참 어렵게 살았다. 86년 남편이 극단 미추를 창단한 이후 극단 운영이 가장 큰 숙제였다. 남편이 생활비를 보태 준 건 2010년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돼 월급을 받으면서다. 그전까진 줄곧 내가 번 돈으로 가계를 꾸렸다. 90년대 초 집을 팔아 경기도 양주에 미추 연습실을 지을 동안엔 우리 가족이 살 곳이 없어 4년 동안 동생들 집에 2년씩 얹혀 살기도 했다. 극단 운영은 연말연시 마당놀이에서 돈 벌어 한 해 운영비를 대는 방식으로 했다. 매번 관객이 안 오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늘 고비였다. 이 산 넘으면 저 산 있고…. 지금까지 그렇다.”



 -생활비에 무심한 남편 탓을 할 법도 한데. “처음부터 예술에 대한 남편의 순수한 열정이 좋았다. 내가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혼했고, 서로 동지란 생각으로 살고 있다.”



 -30년 동안 계속해 오던 마당놀이에서 지난해 은퇴했다. “처음부터 ‘30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이었다. 박수 칠 때 떠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당놀이를 처음 시작했을 땐 마당에서 광대처럼 연기하는 게 창피했다. 정극 무대에서 재면서 조명받는 게 진짜 배우 같았다. 그 뒤 전통 연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마당놀이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마당놀이는 30년 동안 나와 김종엽·윤문식 세 배우가 이끌어 갔다. 후계자가 제대로 없는 게 아쉽다. 신인 배우를 내세우면 관객이 줄어들까 걱정돼 쭉 장기집권하게 됐다. ”



젊은 배우 뽑아 새로운 마당놀이 시작



-극단 미추의 가장 큰 수익원인 마당놀이를 끝냈는데, 향후 대책은 있나. “일단 마당놀이를 재정비할 계획이다. 젊은 배우들의 ‘새로운 30년’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소규모 공연으로 극단을 유지해야 하는데 당장은 굉장히 힘든 상황이다. 2010년 남편이 국립극단으로 가면서 내가 대표를 맡았는데 이제 나까지 국립창극단으로 와 버렸으니…. 아들이 제 몫을 할 기회라는 생각도 든다.”



 -가난한 연극 무대 대신 화려한 TV로 진로를 바꿀 생각은 안 했나. “만약 남편이 없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웃음). 그리고 TV로 보이는 내 연기와 외모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연극은 내가 최고라 생각하고 연기하면 그만인데, TV는 ‘증거’가 남으니 그 환상이 깨지게 되더라.”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니.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 않나. 그런데 돌이켜 보니 내가 평범하게 생겼기 때문에 다양한 배역을 소화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쁘게 살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이 있다면. “술·담배를 안 한다. 연극하는 사람 중에 술주정하는 사람이 꽤 많다. 그게 싫어 술을 아예 안 먹게 됐다. 쉰 넘어 시작한 등산도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난겨울엔 넉 달 동안 감기를 앓았다. 아무래도 좀 쉬어야겠다 싶어 올 한 해 학교에서 안식년을 얻었다. 그런데 예술감독을 맡게 됐으니…. 일할 팔자인가 보다.”





난 취미도 생계형

짬 날 때마다 뜨개질




김성녀가 뜬 코사지. 옷이나 가방에 다는 용도다.
김성녀는 “나는 취미도 생계형”이라고 했다. ‘생산성’을 중시한다는 그의 취미. 바로 뜨개질이다. 그는 어딜 가나 실과 바늘을 챙겨간다. 쉴 틈 없는 일정 속 잠시 생긴 짬이라도 놓치기 싫어서다. 그는 “뜨개질의 정직함이 좋다”고 말했다. 공을 들인 만큼 성과가 눈에 보이고, 가로·세로 코수를 계산해 그대로 따라 하면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에게 뜨개질은 상념을 잊게 하는 놀이이자 휴식이다. 그는 “시장에 가서 실을 고를 때부터 기분이 좋아진다”며 “뜨개질은 나에게 일탈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는 3년 전부터 뜨개질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작품을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원로 배우 백성희·박정자·윤소정 등이 그의 작품 소장자다.



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남자주인공(박근형)이 입고 있는 빨간 뜨개옷이 김성녀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을 가장 잘 써주는 사람은 남편 손진책(65)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다. 아내가 떠준 조끼·스웨터·머플러·모자·장갑·수면양말 등을 즐겨 사용한다. “잠시 쉬는 시간에도 뜨개질을 하는 아내가 안쓰럽다”면서도 “목 이만큼 높은 거 한번 떠주지”라며 아내의 다음 작품을 은근히 재촉한단다.



 지난 18일까지 서울 백성희장민호극장에 오른 국립극단의 연극 ‘3월의 눈’에서 남자 주인공이 입고 나온 뜨개옷(사진)도 김성녀의 작품이다. 극단 담당자가 사온 조끼가 예술감독 손진책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고민하는 소리를 김성녀가 듣고, 아들 입히려고 떠놓은 스웨터를 꺼내왔다. ‘짜다 만 스웨터’가 필요한 장면이었다. 멀쩡한 스웨터 한쪽 팔을 풀어 극 내용에 맞도록 고쳤다. 감독이 퍽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그 역시 흐뭇한 모양이다. “실도 비싼데 실값도 안 주더라. 의상협찬에도 안 넣어주고…”라며 투덜대듯 자랑한다. 참으로 쓰임새 많은 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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