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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New] 선정릉<상>

중앙일보 2012.03.22 04:00 2면 지면보기
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
(문학박사·고고학자)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사적 제199호)은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94)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 윤씨를 모신 선릉(宣陵)과 그들의 아들이자 조선 제11대 왕 중종을 모신 정릉(靖陵)을 한꺼번에 부르는 이름이다. 줄여서 그냥 선릉이라고 하고 봉분이 세 개라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몇 걸음이면 갈 수 있는 조선왕조의 상징이다. 선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조성됐다. 왼쪽 언덕에는 정현왕후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자리 잡고 있다.


성종과 셋째 왕비 정현왕후가 잠든 선릉
작은 할아버지 광평대군 묘 옮기고 조성

잘 단장된 선릉에는 다양한 석물들이 남아 있다. 어명을 받들기 위해 돌로 조각한 문인석과 무인석을 임금 곁에 세웠다. 그들이 빨리 임금에게 달려갈 수 있도록 능을 향해 석마(石馬)를 세웠다. 말과는 달리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들은 주변의 잡귀를 쫓는 성스러운 동물로 왕릉을 등지고 바깥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임금의 혼령이 쉬어 갈 수 있는 혼유석(魂遊石)과 혼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망주석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겨 성군으로 불리는 성종의 능. [사진=문화재청 선릉관리소 제공]


1970년대만 해도 이 석물들과 능원의 가파른 언덕이 인근 언북초등학교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었다. 놀 것이 부족했던 시절, 석물에서 말타기를 하고 잔디가 미끈한 언덕에선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선릉의 허술한 담장 덕분에 하굣길 초등학생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놀이터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 선릉 남쪽으로 몇 채 있던 능지기 집에서 능지기 아저씨가 쫓으러 나와 소리를 지르면 꽁무니를 빼곤 했다. 그때는 사방이 터진 정자 같은 재실도 있었다. 봄·가을로 소풍 나온 아이들이 거기서 도시락을 먹기도 했다. 또 선릉 동쪽으로 지금의 강남등기소 부근 마을은 깨끗한 새 집들이 들어서면서 ‘새마을’이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키웠는데 성품이 뛰어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해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훗날 의경세자의 동생이자 성종의 숙부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년 어린 성종이 왕위를 계승한다.



성종은 25년이라는 재위 기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성군으로 불린다. 법령을 정리해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에 반포했고, 1492년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해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때 공신들인 훈구세력을 견제하려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 세력균형을 이뤄 왕권을 안정시켰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일을 했지만 1494년 12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승하한다.



성종은 조선왕조를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은 성군으로 꼽히지만 개인사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한명회의 딸로 성종의 첫 번째 왕비가 된 공혜왕후 한씨는 성종이 즉위한 후 5년 만에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순릉에 모셔졌다. 이후 숙의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는데 그가 바로 연산군의 생모다. 숙의 윤씨는 질투가 심해 후궁 문제로 성종과 갈등을 빚었다.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폐비가 돼 친정으로 쫓겨나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지금 선릉에 묻혀 있는 정현왕후는 성종의 세 번째 왕비로 제11대 임금 중종을 낳았다. 성종은 부인 12명에 16남12녀의 자녀를 뒀다.



조선시대엔 임금이 승하하면 왕릉 입지를 정하는 일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다.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이라는 기준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풍수지리 요건을 갖춘 길지여야 했다. 선릉 역시 그런 기준을 갖춘 명당이었는데 특이한 것은 이 터가 원래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이며 성종에게는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광평대군의 묘자리였다는 사실이다. 광평대군 묘를 현재의 수서동 묘역으로 이장하고 선릉을 조성한 것이다. 그런데 애초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선릉 터를 반대했고 연산군 역시 할머니 인수대비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때만 해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을 몰라 할머니 인수대비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왕실의 외척이자 훈구공신인 영의정 윤필상(1427~1504)이 풍수적인 이유를 들어 성종의 선릉행을 관철시키는데, 그 또한 결국 몇 년 후 진도로 유배돼 죽임을 당한다.



성종의 장례는 1495년 4월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해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 언덕에 유해가 안장되면서 마무리된다. 그런데 그 한 달 전쯤인 3월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날 연산군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때부터 연산군의 패륜적 비극은 시작된다.



한편 성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대모산 자락으로 이장한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오히려 번성해 역사의 아이러니가 된 반면 안타깝게도 선릉은 비극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 선릉은 유해를 잃어버린 빈 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선릉과 정릉을 도굴하고 재궁(梓宮, 왕과 왕비의 관)까지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1625년(인조 3년)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했다. 홍살문과 능에도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수난을 겪었다.



선릉은 역사적인 유적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이름인 삼릉공원처럼 꽃 피는 봄날 주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이곳을 한번 찾아간다면 600년 조선왕조를 지킨 고도 서울의 역사적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병식 강남문화원 부원장(문학박사·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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