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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 여론 女論] 왕자님과 공주님

중앙일보 2012.03.22 00:00 종합 37면 지면보기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이(李)왕세자 전하와 이본궁방자(梨本宮方子)여왕 전하의 가례택일이 작정된 뒤로 추운 일기가 벌써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는 것같이 변화하여져서 지나간 10일 육화(六花·눈)가 흩날리던 날에도 오후 6시경에 이왕세자 전하께서는 사무관 이하 십여 명의 수행원을 데리시고 이본궁 저(邸)에 가시와 이본궁 두 전하와 방자여왕 전하와 만찬을 같이 받으셨는데 그날 방자여왕 전하께서 입으신 순일본식의 복장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고, 이왕세자 전하와 한 시간 동안이나 대면하시어 이야기하셨으며, 특히 이본궁 저 내의 설경은 이날 밤 두 분이 만나시는 때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더라.”(‘경사로운 가례 전에 양 전하의 어회식(御會食)’, 매일신보 1918.12.17)



 왕세자와 여왕이 결혼 날짜를 잡은 뒤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동안 때마침 눈이 내려 이들의 결혼을 축하했다는 위의 서술은 낭만적인 동화의 한 장면 같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실 한국에서 일어난 비극적 역사의 한 토막이다.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李垠·영친왕)과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가 일본에 의해 정략결혼을 올린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이들 사이의 결혼설이 등장한 1916년부터 지속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필연적인 일이며 아름다운 결합임을 선전했다. 그 선전 방법이 이들의 결혼을 상류층 선남선녀의 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의 서사로 포장하는 것이었다. 화려한 결혼식과 선남선녀의 애틋한 결혼 전 교류의 모습 등은 이들을 ‘스타’로 만들었고, 대중으로 하여금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정치적 현실의식보다 감상적 동경의 감정이 앞서도록 조장했다. 그리고 축하품 모집, 축하시 공모 등으로 대중에게 이 선전 효과를 확인하려는 작업도 이어졌다.



 이은의 결혼은 조선의 황태자가 일본의 황족과 결합함으로써 500년간 이씨 왕조에 의해 지배돼 왔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소멸을 재현한 상징적 사건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됐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굴욕적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본질은 매체가 조작한 낭만적인 사랑의 서사에 의해 호도됐다.



 최근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선풍적 인기에서도 봤듯 왕자·공주의 결혼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적인 스토리다. 현대판 왕자, 공주인 재벌2세들의 사랑 이야기 역시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재미난 스토리를 즐기느라 놓치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비극적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허구 속 상류층의 화려한 삶을 선망하는 동안 우리가 인식하고 바꿔 가야 할 진짜 현실이 외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겠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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