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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419> 세계 오케스트라 5

중앙일보 2012.03.22 00:00 경제 13면 지면보기
‘베를린 필하모닉’하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 클래식 음악만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역사는 길게 잡으면 200년 정도됩니다. 뉴스클립은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역사와 실력을 겸비한 각국의 오케스트라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독일·오스트리아·미국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교향악단들입니다.


카라얀 절정기 파트너 베를린 필 … 번스타인 지휘로 활짝 핀 뉴욕 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일: 1887년

소재지: 독일 베를린



사이먼 래틀(Simon Rattle)이 지휘를 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87년 창단된 베를린 필은 125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중앙포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18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폴란드 레그니차 시립 관현악단 출신 지휘자인 벤야민 빌제는 베를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빌제 관현악단(Bilse-Kapelle)’을 창단했다. 악단은 독일에서 보기 드문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무리하게 연주 횟수를 늘려 단원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1882년에 악단 내부 분열로 일부 단원이 탈퇴해 새로운 악단을 결성했다. 이것이 베를린 필의 출발점이다. 창단 초기에는 재정난으로 지휘자도 객원 초빙 방식에 의지했다. 1887년에 공연 기획자였던 헤르만 볼프가 재정 지원을 결정하고 한스 폰 뷜로를 초대 상임지휘자로 발탁하면서 베를린 필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베를린 필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운영 방식을 바꾸게 된다. 세계대전 패전과 인플레이션 등으로 독자적인 운영이 불가능해 베를린시와 독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고 그 대가로 일정 횟수의 연주회를 의무적으로 개최한다. 이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새로 들어선 나치 정권하에서는 사실상 국립 관현악단이 됐고, 각종 행사나 위문 공연에 동원됐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공연장이 폭격을 받는 등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돼 활동 자체가 위축됐다. 종전 후에는 나치정권 시절 연주 금지 곡목이던 유대인 작곡가들의 작품이나 미국·러시아 등의 공연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1952년에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로 재취임했으나 건강 악화로 연주회 개최 횟수는 늘어나지 못했다.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대타로 전후 최초의 미국 공연을 이끌어냈고, 이듬해 정식으로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종신 음악감독직을 겸직한 카라얀은 도이체 그라모폰, EMI 등과 함께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작품의 녹음을 남겨 악단의 명성 확립에도 공헌했다. 이후 영국 출신 사이먼 래틀이 2002년 취임해 현재까지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일: 1842년

소재지: 오스트리아 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842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오토 니콜라이가 빈 궁정 오페라극장 소속 관현악단을 연주회용 악단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을 한 후 처음으로 연주회를 한 3월 28일을 창단 시기로 잡고 있다. 오페라 관현악단을 모체로 해서 생겨난 전문 악단이라 독자적인 연주회 횟수는 적었지만 오스트리아 최초의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 화제를 모았다. 니콜라이가 1848년 사임한 뒤에는 객원 지휘에 의존하다 1854년 카를 에케르트가 2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했으나 3년 활동에 그쳤다. 1860년대 초반에는 부진한 활동으로 악단 안팎의 비판 여론이 거세졌고 결국 단원들 스스로가 악단 운영을 책임지는 자주 운영제를 채택하고 투표에 의해 지휘자를 초빙하는 등 독특한 운영 체제를 확립했다.



 1875년에는 한스 리히터를 상임 지휘자로 초빙해 브루크너와 브람스의 교향곡들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초연하기 시작했다.



 악단은 1938년 큰 시련을 맞이한다. 그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돼 ‘오스트마르크 주’ 로 격하되고 나치 고위층에서 악단의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한 음악계 중진들의 노력으로 해산은 면했으나 유대인 혹은 유대계 단원들이 강제 해직돼 강제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에는 악단의 명물이 된 빈 신년음악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악단 재건 등의 문제로 연주회를 열지 못하다 요제프 크립스의 지휘로 전후 첫 연주회가 개최됐다. 악단 운영에 관한 것들은 단원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며 일체 외압을 배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악단의 독립성은 철저하게 보장되고 있으나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일: 1842년

소재지: 미국 뉴욕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842년 바이올리니스트 유렐리 코렐리 힐(Ureli Corelli Hill)이 주축이 돼 뉴욕시에 필하모닉 협회를 설립했다. 그해 12월 7일 아폴로 룸즈라는 소규모 공연장에서 첫 연주회를 한 것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시작이다. 힐은 1847년 오하이오주로 이주할 때까지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후임으로는 테오도르 아이스펠트와 칼 버그먼, 레오폴트 담로슈가 차례로 임명됐다. 그러나 단원들은 적은 임금 등의 불만으로 자주 교체됐다.



 1877년에 시어도어 토머스가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면서 악단의 분위기와 처우를 쇄신하기 시작했다. 이어 1891년 취임한 안톤 자이들이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를 초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 뉴욕 필의 연주력 향상과 레퍼토리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1909년에는 말러가 상임 지휘자로 초빙됐고 동시에 단원 증원과 운영권 재정비 등의 개혁이 단행됐다.



 상임지휘자 바비롤리는 운영진과 후원자들의 인기를 얻지 못해 1941년 물러났고 약 2년간의 공백 후 임명된 아르투르 로진스키도 특유의 가혹한 연습 방식 등으로 인해 단원들과 불화를 빚어 1947년 사임했다.



 로진스키 사임 후에는 브루노 발터가 음악 고문이라는 직책으로 잠시 활동했다. 1949년에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가 공동으로 상임 지휘자 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1958년에는 시어도어 토머스 이래로 약 60년 만에 최초로 미국인인 레너드 번스타인이 상임 지휘자 직책을 이어받았다. 번스타인은 ‘청소년 음악회’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악단의 명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번스타인 재임 시기부터 종래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에서 ‘뉴욕 필하모닉’ 이라는 단축형의 공식 명칭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앨런 길버트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설립일: 1888년

소재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1881년 9월 ‘콘서트하우스 건립을 위한 임시위원회’가 꾸려지고 다음해에 콘세르트허바우 재단이 설립됐다. 암스테르담의 토지는 대부분 습기가 많고 질퍽해 1883년 여름부터 2186개나 되는 말뚝을 땅에 박아 넣고 본격적인 콘서트장 걸립 공사를 시작했다.



 1888년 4월 11일 문을 연 콘서트장에는 3년 뒤 2726개의 파이프가 달린 마르스하케르베이르트 오르간이 설치된다. 개관한 지 반 년 만인 1888년 11월, 56인의 연주자로 구성된 콘세르트허바우 재단 오케스트라와 상임 지휘자 빌럼 케스가 처음으로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스는 테이블과 의자 웨이터를 없애버리고 청중이 제대로 음악을 감상하게 했다. 첫 연주회에선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 등을 선보였다. 각 파트의 수석은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연주자가 솔로 연주를 맡았다. 케스의 뒤를 이어받아 빌럼 멩엘베르흐가 상임지휘자를 이어 받았다.



 1900년대 들어 연주자들의 활동과 급료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커졌고 지휘자의 권력과 권한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03년 악장 스포르와 첼로 수석 모설을 포함해 30명의 연주자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50년 동안 오케스트라를 이끈 음악감독 빌럼 멩엘베르흐의 마지막은 치욕스러웠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16명의 유대인 단원이 추방되는 것을 그저 지켜 보기만 한 그는 1945년 네덜란드 문화정책위원회로부터 6년간의 지휘 금지령을 받았다. 1963년 3월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는 정식으로 상임 지휘자가 된다. 그는 상임 지휘자로 재직한 27년간 714개의 작품으로 거의 1000여 차례의 녹음 활동을 벌였다. 1988년 허바우는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네덜란드의 문화를 꽃 피게 하고 세계에 네덜란드의 명성을 알린 공을 인정 받아 왕실은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사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설립일: 1882년

소재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테르부르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관현악단은 1772년에 설립된 페테르부르크 음악협회의 부속 관현악단으로 기록되고 있다. 1802년에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협회의 관현악단이 창단돼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 악단은 대부분 단명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의 계보를 잇는 첫 악단은 1882년 창단된 황실 소속 관현악단이었다. 창단과 동시에 독일 출신 지휘자인 헤르만 플리게를 상임 지휘자로 초빙했고 플리게는 1902년까지 재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면서 황실 소속 자격을 자동으로 상실했고, 사임한 바를리흐 후임으로 세르게이 쿠세비츠키가 상임 지휘자에 취임했다.



 소비에트 정권 치하에서는 인민의 관현악단으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대중 음악회에 자주 출연하는 등 새로운 활동상을 추구했고, 쿠세비츠키가 소련 문화정책에 거부감을 표명해 1920년 사임한 뒤 악단 내부에서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1930년 알렉산드르 가우크가 신임 상임 지휘자에 취임하면서 연주력 회복에 주력했고, 가우크 후임으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망명 지휘자였던 프리츠 슈티드리가 임명됐다.



 그러나 슈티드리는 스탈린 치하의 획일적이고 국수적인 문화정책에 환멸을 느껴 미국으로 다시 이주했고, 후임으로 당시 35세의 젊은 지휘자였던 예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임명됐다. 므라빈스키는 재임 초기에 일부 노장 단원으로부터 실력을 의심받기도 했지만 엄격하고 꼼꼼한 리허설 방식과 효과적인 지도력으로 악단의 연주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예프 등의 동시대 작품들도 초연했다. 1988년에 50년 동안 장기 재임해 오던 므라빈스키가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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