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운 부르는 대나무 손잡이, 뱀부백

중앙선데이 2012.03.18 03:40 262호 28면 지면보기
영화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의 촬영현장에서 폴 뉴먼(오른쪽)고 함께 출연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뱀부백을 들고 있다.
1950~60년대 최전성기를 누리던 구찌가 70~80년대 몰락을 거듭한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 시기 형제간의 재산 싸움이 벌어졌고 브랜드를 과도하게 라이선싱하면서 ‘구찌’ 이름을 단 제품이 2만 종이 넘어 이미지는 추락했다. 경영은 방만해 91~93년 구찌의 적자는 1억2000만 달러로 파산 직전이었다. 이때 구찌는 새로운 직원,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사업 계획으로 무장하는 개혁을 시도했다. 그 중심엔 톰 포드가 있었다.

브랜드 시그너처 <15> GUCCI

실내 건축을 전공했고 모델·배우로도 활동했던 그가 구찌에 합류한 건 스물아홉이던 90년. 94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돼 3년 만에 브랜드를 회생시킨 톰 포드가 구찌에서 처음 만든 것은 바로 ‘뱀부(Bamboo) 백’이었다.

“대나무 손잡이가 달린 배낭이 내가 구찌에 와서 만든 첫 작품입니다. 출근 첫날에.”

플래그십 익스클루시브 뉴뱀부백
GG 로고, GRG 웹(그린-레드-그린을 조합한 스트라이프), 화려한 꽃무늬, 홀스빗(Horsebit·말 재갈 모양을 본뜬 로퍼의 장식) 등 한눈에 구찌임을 알아볼 수 있는 아이콘은 많다. 하지만 하나를 꼽으라면 뱀부다. 소재부터가 남달라 “영향을 받았다”며 차용할 수도 없게 독보적이다.

구찌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브랜드도 없다. 소위 ‘명품 브랜드’들은 오랜 시간 쌓은 연륜과 그 속의 다채로운 이야기로 가치를 극대화한다. 실력·행운·우연이 버무려진 탄생 비화, 아름답고 고귀한 셀레브리티와의 인연, 드라마 같은 성공 신화가 켜켜이 쌓인다. 여기에 구찌는 9회 말 투아웃 끝내기 홈런처럼 극적인 역전 스토리까지 지녔다. 앞서 언급한 것뿐 아니라 뱀부백의 탄생도 난국을 타개하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

1921년 구치오 구찌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매장을 열고 얼마 안 가서다. 30년대 국제연맹이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구찌는 가죽 공급이 원활치 않자 대안을 찾아나섰다. 나폴리산 마·삼을 짠 거친 직물을 최초로 사용해 가방을 만들었다. 태닝된 천엔 최초의 시그너처 프린트를 찍어냈다.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연결돼 십자무늬 형태를 이루는 디아망테(Diamante) 무늬다. 이 십자 배열은 구찌를 상징하는 GG로고의 선구적인 디자인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이 된 이탈리아의 사정이 좋았을 리 만무하다. 수많은 가죽 업체가 자재난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구찌의 큰아들인 알도는 보통의 피혁 대신 돼지가죽을 사용하는 대안을 찾았다. 유일하게 수입 가능했던 일본산 대나무를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대나무에 열을 가해 부드러워지면 반원 모양으로 구부러뜨려 가방 손잡이로 사용하는 것이다.

47년 ‘0633’이란 모델 번호로 처음 소개된 ‘뱀부백’은 금세 인기를 얻었다. 마침 50~60년대는 이탈리아 영화의 전성기였다. 이탈리아 영화 속에 여배우들은 구찌의 뱀부백을 들고 출연했다. 54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Viaggio in Italia)’에선 잉그리드 버그먼이, 66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Blow Up)’에선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뱀부백을 들었다. 영화의 부흥에 따라 이탈리아는 영화 스타들의 인기 쇼핑 스폿이 됐다. 구찌는 재클린 케네디, 그레이스 켈리, 데버러 커 같은 당대 패션 아이콘들이 사랑하는 브랜드가 됐다.

손잡이는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대나무를 ‘굽고’ 구부려서 곡선 형태의 튼튼한 조임새 손잡이를 만드는 데 약 13시간이 걸린다. 당연히 제각각 구부러진 정도가 다르고, ‘굽기’에 따라 색깔도 달라진다. 주문 제작(made to order)으로 구매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가방 몸체 가죽의 종류·색깔만이 아니다. 살짝 구운 옅은 색이거나 많이 구운 짙은 색으로 손잡이 색도 고를 수 있다.

지난주 구찌는 14개월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서울 청담동 플래그십 스토어를 다시 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구찌가 한국 고객에게 특별히 선보인 것도 뱀부백이었다. 베이지색 악어가죽으로 만든 전 세계 단 하나뿐인 버전의 뉴 뱀부백은 단 하루 만에 판매됐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