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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게임

중앙선데이 2012.03.18 03:06 262호 35면 지면보기
1977년 3월 27일 아프리카 북부 카나리아섬 ‘라스 팔로마’공항 인근 꽃가게에서 폭탄이 터졌다. 공항 측은 즉각 공항 폐쇄 후 착륙 예정이던 여객기들을 인근 비행장으로 돌렸다. 미국 팬암기 1736편과 KLM항공 4805편도 다른 3대의 여객기와 함께 활주로가 하나뿐인 작은 로스로데오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는 지시에 따라 이륙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KLM 4805편이 활주로의 한쪽 끝에서 이륙 신호를 기다렸다. 안개 외에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활주로의 반대편에선 팬암 1736편이 역시 이륙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두 여객기의 기장들은 자신이 관제탑으로부터 이륙 지시를 받았다고 각기 믿고 있었다. 옅은 안갯속으로 두 대의 비행기는 달리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한 채. KLM 4805편이 시속 265㎞에 접어들며 막 이륙하려는 바로 그 순간, 두 여객기는 공중 충돌하며 불길에 휩싸였다. 세계 최악의 항공사고였다. 583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6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륙 순간 관제요원이 이어폰으로 축구경기를 듣고 있던 것도 문제였지만 기장들의 ‘설마’가 대참사를 초래한 것이다.

195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제임스 딘도 그렇게 죽었다. 55년 9월 30일 오후 촬영장을 벗어나 ‘포르셰 550 스파이더’를 몰고 자동차경주장으로 향하던 그는 LA 인근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중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은색 차를 발견했다. 양쪽 차는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상대가 늦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두 차는 박살 나고 운전자들도 즉사했다. 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자동차 게임’이 있었다. 바로 ‘치킨게임’이었다. 한밤중 도로 양끝에 두 대의 차를 세워놓고 마주 달리게 한 다음 먼저 핸들을 꺾는 쪽이 지는 게임이다. ‘겁쟁이’라고 매도되고 ‘치킨’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한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둘 다 죽는다. 공멸이다. 미·소 사이의 무분별한 군비 확장 경쟁 자체가 치킨게임으로 명명됐다. 국제정치학 용어가 된 것이다.

치킨게임이란 단어가 생긴 지 60여 년이 흘러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그것이 재현되고 있다. 자충수를 거듭하던 여당이 간판을 새로 바꿔 단 것도 그렇고, 민주통합당이 과거를 부정하면서까지 정권 재창출 전략을 펼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충수다. 그게 아니라고 강변한다면 최소한 불순세력에 오염된 듯하다. 대통령 단임제를 선택한 나라의 필연적 운명은 다른 정권이 결정한 정책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하는 ‘양보’의 양식에 바탕을 두어야만 가능하다. 적어도 뒤집어야 할 정책에 어느 정도의 ‘커트라인’을 그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당시 자신들이 결정한 정책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국가적 정책들을 지금 와서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뒤집는다면 다음, 그리고 다다음 정권들도 이를 되풀이할 것이다. 공무원들로선 ‘지옥’이다.

정치권은 정작 대다수 국민에게 도움을 줄 ‘의약품 수퍼 판매’ 같은 민생법안조차 자신들의 이해득실 때문에 소신을 저버린다. 일본으로부터 소식이 날아왔다. 일본의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14% 줄이기로 합의했단다. 여당인 민주당이 스스로 연간 세비를 300만 엔씩 삭감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야당인 공명당이 호응해 이번에는 급여 20% 삭감을 제안했다. 이에 질세라 여당인 민주당은 아예 의원 수를 80명쯤 줄이는 걸 검토하고 있다. 지방의회들도 의원 세비를 삭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우리 정치인들께 물어보자. 이 게임의 이름은 뭔가요?



김재명 부산 출생. 중앙고·성균관대 정외과 졸업. 1978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전자 등에서 일했으며 전북도 정무부지사를 역임했다. 저서로 『광화문 징검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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