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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원전 사고보다 더 무서운 건 거짓말이었다

중앙일보 2012.03.15 00:53 종합 1면 지면보기
부산시 기장군 고리원자력발전소. 이곳엔 요즘 한창 방벽 쌓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쓰나미가 와도 끄떡 없도록 고리 1~4호기 앞 해안 방벽을 현재의 7.5m에서 10m로 높이는 공사다. 지난주 기자가 현장을 찾았을 때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는 “지금 방벽으로도 충분하지만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방벽 높이기를 포함, 5년간 한수원은 원전 안전을 위해 1조1000억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12분 완전정전 초유의 사태
목격 직원만 수십 명, 모두 침묵
부산시의원이 우연히 알게 돼

 그런데 이 천문학적인 돈이 말 그대로 ‘매몰 비용’이 되게 생겼다. 원전 사고보다 무서운 적(敵)이 방벽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은폐와 거짓말이란 적이다. 지난달 9일 고리 1호기에 12분간 전원이 끊겼다. 백번 양보해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자. 문제는 다음이다. 발전소 직원들은 이를 한 달여나 숨겼다. 자칫 하면 영영 묻힐 뻔했다. 부산시의회 김수근 의원이 우연히 사고 소식을 듣고 확인에 나서면서 비로소 진상이 알려졌다. 한수원 사장도 원자력안전위원회도 몰랐다고 한다. 현장에 감시 인력을 파견해 놓고도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사고가 터진 지난달 9일로 거슬러 가보자. 이날 오전 지식경제부와 한수원은 원전 고장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목표는 ‘고장 제로’, 방법은 ‘엄벌’이었다. 작업자 과실을 무겁게 처벌하고 기관장 평가에도 반영하겠다는 제재 내용이 주였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1년을 맞아 불안이 커진 데다 핵안보정상회의도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을 때다. 업계 관계자는 “당장 손쉽게 효과를 내기 위해 문책 위주의 고강도 대책을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8시34분. 고리원전 1호기의 전기가 끊겼다.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직원만 60~100명. 그러나 이 일은 한 달 넘게 비밀에 부쳐졌다. 김종신 한수원 사장은 “마침 사고 방지를 다짐한 바로 그날 문제가 터지자 직원들이 가슴앓이만 하며 시간을 흘려버린 것 같다”며 "그러다 내부 제보로 알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원전 고장은 한 해 7~8차례 생긴다”며 “무턱대고 이를 ‘제로’로 만들라며 몰아붙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원전은 철옹성이다. 내부로 들어가려면 2중, 3중의 엄격한 보안 점검을 받아야 한다. 직원들이 입을 닫으면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바깥에선 알기 어렵다. 문제를 숨기고 축소하고 싶은 유혹이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지난해 4월에도 그랬다. 3호기 정전으로 비상발전기가 작동됐다. 고리원전 측은 ‘전기 계통 이상’이라는 말로 넘어갔다. 기자들이 추궁하자 비로소 정비 직원의 실수를 인정했다. 사고 후 9시간이 지난 뒤였다.



 14일 홍석우 지식경제부 장관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관계자들을 엄중 문책하겠다고도 했다. 한수원 사장도 “책임 질 게 있으면 지겠다”고 했다. 문제의 뿌리인 원전 운영의 불투명성은 그대로 둔 채 ‘문제 발생→책임 추궁’이란 도식을 되풀이한 것이다. 이래서야 다음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서울대 황일순(원자핵공학) 교수는 “안전 설비라는 하드웨어 못지않게 투명성 확보를 위한 소프트웨어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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