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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학교폭력이 웹툰 때문이라니

중앙일보 2012.03.15 00:00 종합 30면 지면보기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만화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한 건 초등 4학년 때부터였다. 당시 남자 작가로는 이현세·허영만·박봉성, 여자 작가로는 황미나·김혜린·신일숙 등이 최고 인기였다. 자연스레 오락실에도 발을 들여놓게 됐다. 만화든 게임이든 중독성은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다 끝내고 오지 못한 만화의 결말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지 못한 ‘갤러그’ ‘1942’ ‘원더보이’ 같은 게임 화면도 아른거렸다. 다음 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달려간 건 당연지사였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빠져들었던 만화와 게임 중엔 폭력적인 내용도 없진 않았다. 격투기게임에서 이기려면 상대의 코피를 터뜨리고 가차없이 턱이 돌아가게 만들어야 했다. 그걸 위해 미친 듯 오락기계 버튼을 눌러대는 스스로가 딱하게 여겨진 적도 있었다.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다. 세상엔 이것 말고도 재미있는 게 많다는 사실을 성장과 더불어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불현듯 어린 시절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만화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만화의 유해성 논란 때문이다. 방통심의위는 지난달 ‘전설의 주먹’ 등 웹툰(인터넷 만화) 23편에 대해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겠다고 통보했다. 이 소식에 반발한 강풀·윤태호·주호민 등 만화가들이 며칠 전부터 릴레이 1인 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방통심의위가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른 학교폭력의 원인을 웹툰에 돌렸기 때문이다. 집단구타·욕설 등 폭력적 내용이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결국 학교폭력으로 발현됐다는 식의 논리다.



 청소년기 만화와 게임에 심취(?)했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비약도 없다. 무엇보다 폭력적인 만화와 게임에 탐닉한다고 해서 사람이 비뚤어진다는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 창작물은 현실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보탬으로써 결국 현실과 결별한다. 청소년기에 이걸 구분하는 판단력을 갖는 건 평소 가정이나 사회와 얼마나 건강한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본인과 부모, 학교 3자의 문제인 것이다. 23편 중 ‘살인자 ㅇ난감’은 망치로 사람을 죽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주인공이다. 이 만화에 공감해 망치로 연속 살인하는 걸 당연스럽게 받아들일 정상인이 있을까. 설령 미숙한 사고 탓에 현실과 작가의 상상력을 혼동한다 해도 일차적 책임을 물을 곳은 창작물이 아니다.



 만화와 학원폭력의 상관관계를 주장하고 싶다면 정교한 연구가 뒷받침돼야 한다. 아니라면 그저 ‘웹툰 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웹툰의 교실폭력 유발이 문제라면 (학생들 사이에 강탈 사건이 일어나는) 노스페이스(점퍼) 판매도 규제해야 되나”라는 조롱이 나도는 걸 방통심의위는 아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23편 중엔 지난해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받거나 (‘더 파이브’) 문화부가 선정한 ‘오늘의 우리만화’ 상을 받은 만화(‘살인자 ㅇ난감’) 도 있다. 상 줄 땐 ‘작품’이고 규제할 땐 ‘유해매체’인가. 그것도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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