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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의 시시각각] 김무성의 진가

중앙일보 2012.03.15 00:00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상일
논설위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란 글귀가 적혀 있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송백(松栢·소나무와 잣나무)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논어』에 나오는 이 공자 말씀은 ‘겨울이 돼야 송백의 진가(眞價)를 알듯 사람의 진가도 어려울 때 드러난다’는 걸 의미한다. 세한도의 문구를 떠올린 건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4선·부산 남을) 의원이 12일 보낸 휴대전화 메시지를 받고서다. “…당과 동지를 떠나면서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도(正道)로 가야지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우파 분열의 씨앗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 끝에 백의종군이 가야 할 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런 내용의 문자를 읽고 그에게 전화로 물었다.



 -신당 창당 유혹도 강하게 느꼈다고 썼던데 왜 당에 남기로 했나.



 “혼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길, 낙천자들과 함께 신당을 만들고 자유선진당·국민생각과 함께하는 길, 백의종군하는 길 등 세 가지를 놓고 며칠간 고민했다. 세 경우에 대한 선언문도 만들어 놓았다. 오늘(12일) 아침 결심을 하기 위해 보좌진으로 하여금 선언문을 낭독하게 했다. 무소속 출마, 신당 창당에 관한 걸 듣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민추협 창립 발기인으로 정치에 입문했을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당을 바꾸지 않겠다고 작심했던 걸 상기하며 백의종군을 결심했다. 지금부턴 탈당을 고민하는 동료 의원들을 설득할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가.



 “정치를 길게 봐야 한다. 홧김에 잘못을 저지르면 우파를 분열시켜 좌파를 돕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해군을 해적이라고 칭하는 세력에 국가를 맡길 순 없지 않은가. 공인의 족적은 역사에 남는 것인 만큼 분하더라도 참고 바른 길을 가자.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김 의원의 별명은 곰이다. 풍채가 주는 인상처럼 정치를 선 굵고, 우직하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그는 원내대표를 하면서 야당 측 파트너로 꾀가 많은, 그래서 별명이 여우인 박지원 현 민주통합당 의원에게 종종 져주는 모습을 보였다. 여당이 양보하면 야당도 비교적 합리적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다. 말썽 많은 18대 국회에서 국회 운영이 가장 원만하게 이뤄졌던 시절은 두 사람이 원내대표를 맡았을 때다.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등 중요한 안건이 큰 무리 없이 처리된 건 둘이 된장에 풋고추처럼 궁합을 맞추면서 정치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김 의원이 현역 의원 컷 오프 룰(하위 25%는 무조건 배제)에 걸렸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잖다. 본인도 어이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곰처럼 참으면서 ‘승복이 정도’라고 했기에 그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친박계 좌장을 하다 사연과 오해가 쌓여 이탈한 김 의원이 ‘박근혜의 새누리당’을 등졌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낙천한 친이계 의원들의 연쇄 탈당으로 새누리당은 크게 흔들렸을 거다. 선진당이나 국민생각은 의원 이삭 줍기로 재미를 보면서 합당 절차를 밟고 있을 것이다. 원내 제3당을 만들면 국고보조금을 많이 챙기게 되고, 총선 기호로 ‘3’을 배정받을 수 있어서다. 결국 우파는 대분열로 야권연대를 이룬 좌파 앞에서 지리멸렬한 모습을 노출했을 것이다.



 김 의원의 백의종군으로 소위 ‘비박(非朴)연대’는 물거품이 됐다.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의원 대다수가 ‘김무성의 길’을 따르는 바람에 선진당이나 국민생각은 김칫국만 마신 셈이 됐다. 양당 합당설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됐다. 새누리당 낙천 의원 중 유일하게 국민생각으로 몸을 옮긴 이가 김 의원의 선택을 “정도가 아니다”라며 깎아내린 건 낙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우파의 파열을 상상하며 수도권과 영남에서 어부지리(漁夫之利)를 기대했던 민주통합당도 실망했을지 모른다. 김 의원의 결단은 총선 구도를 바꾼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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