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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삼시협약

중앙일보 2012.03.09 00:32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총독부 시정(施政) 30년사’에 따르면 1925년 6월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三矢宮松)와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 휘하의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于珍)이 ‘한인(韓人) 취체(取締·단속)에 관한 쌍방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이 만주의 많은 한인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고 간 이른바 ‘삼시협약(三矢協約·미쓰야 협약)’이다.

 그 핵심은 만주 지역 한인의 호구를 재조사하고, 독립운동 단체의 무장을 금지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면 중국 관헌이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인계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지명하는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를 체포해 인계한다는 내용도 있다. 협약 체결 이후 장작림 군벌정권은 많은 한국 독립운동가를 총독부에 인계해 사형 당하거나 고문·투옥 당하게 했다. 독립운동가를 색출한다는 핑계로 일반 농민들을 괴롭히거나 재산을 강탈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삼천리’ 1931년 6월호는 ‘현하(現下)의 재만(在滿) 조선농민의 궁경(窮境·곤궁한 지경), 그 원인과 피해상황’이란 논설에서 “(1926년) 이래 금일까지 각지의 중국 군경(軍警)이 삼시협정을 이유로 조선인 독립단(獨立團)을 취체한다는 구실 아래 농가에 임검(臨檢)하여 금품을 강요하며 개인의 배를 살찌우는 일이 발호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국내의 다른 신문은 1926년 7월 “학교를 불허하고, 교회당을 폐쇄하며, 주민을 축출하고, 토지를 탈환하는 등 횡포가 마구 늘어간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장작림은 1928년 6월 일본군이 열차에 폭탄을 설치하는 바람에 되레 폭사(暴死)당했다. 그 뒤를 계승한 장학량(張學良)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일제에 빼앗기고 도주해야 했다.

 일제는 1932년 3월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하고 그 직후 삼시협약을 폐기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 1932년 2월 25일자는 ‘양민(良民)들의 원망의 표적이 된 삼시협약을 폐기’라는 제목 아래 ‘악용당한 일도 많았다’고 그 폐해를 인정하고 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최근 중앙일보 칼럼에서 “중국은 1996년 평양과의 양자협상에 따라 북한 출신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송환자를 수감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북한으로 강제 추방해 왔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런 협약이 존재한다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강제 송환되었던 삼시협약의 현대판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커진 힘을 자랑하기 전에 인권이 무엇이고, 문명국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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