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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51) 대우까지 처리한 워크아웃

중앙일보 2012.03.06 00:00 경제 6면 지면보기
1998년 등장한 워크아웃은 외환위기로 쓰러져가는 중견기업들을 되살리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수십조원의 빚을 진 대우그룹도 워크아웃 프로그램으로 처리됐다. 99년 8월 26일 서울 은행연합회관에서 제일은행의 류시열 행장(왼쪽)이 채권단을 대표해 대우 워크아웃을 확정하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중앙포토]


없는 사람들에게 위기는 더 가혹한 법이다. 집을 팔고 차를 팔아 위기를 간신히 버텨내고 나면, 기다리는 건 더 가난해진 살림이다.

파산법 작동 안 될 때 워크아웃은 그나마 숨통 터주는 기회였다



 기업도 그렇다. 외환위기 당시, 재벌들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계열사며 부동산을 팔아 빚을 갚았다. 환란 주범으로 몰린 만큼 ‘자기 책임’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은행이나 정부에 손을 벌리기 어려웠다. 재벌은 그랬다 치자. 가진 게 적은 일반 기업들에 외환위기는 더 가혹했다. 은행에 버림받고 시장에 외면당했다. 내다 팔 게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1997년 12월 한 달에만 3197개의 회사가 부도나 문을 닫았다. 하루 평균 100개 넘는 회사가 쓰러져 갔다.



 내가 이성규의 유학길을 막은 건 그래서였다. 한국신용평가에서 데리고 일했던 이성규. 기업 재무구조 분석에 뛰어났다. 영화를 배우러 로드아일랜드 대학에 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남아서 기업 회생 작업을 좀 도와다오.” 그는 뿌리치질 못해 유학의 꿈을 접었다. 처음엔 정식 소속도 없었다. 나중에 과로와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도 했다. 나 때문에 인생이 꼬이고 몸이 망가졌다. 하지만 이성규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을 것이다.



 기업 회생 작업. 국내에선 ‘워크아웃(기업 개선 작업)’이라 불렀다. 내가 끌어온 이름이다. 원래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가 내놓은 다이어트 비디오 제목이었다. 열심히 운동해 군살을 빼고 강한 근육질 몸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를 경영 용어로 만든 이가 GE의 잭 웰치다. 구조조정으로 계열사 경쟁력을 높이는 작업을 그렇게 불렀다.



 국내에선 이런 의미로 쓰였다. 부도 위험에 몰린 부실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시켜 정상 기업으로 회생시키는 작업. 부도가 나는 이유는 하나다.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채권자들이 모여 “빚을 깎아줄 테니 조금만 갚으라”든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갚으라”고 말해 준다면? 상당수의 회사가 살아날 것이다. 길게 보면 채권자에게도 이익이다. 부도난 회사에서 빚을 회수하기는 어렵다. 빚잔치를 해봐야 빌려준 돈의 절반 건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회사를 살려놓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빚을 돌려받기 쉬워진다. 이게 워크아웃의 원리다. 물론 아무 회사나 다 살아나는 건 아니다. 나름대로 경쟁력 있되 일시적 어려움을 겪는 회사라야 한다. 완전히 썩은 회사는 쓰레기처럼 팔아치울 수밖에 없다.



 워크아웃의 틀은 ‘런던 어프로치’를 바탕으로 짰다. 런던 어프로치. 1970년대 후반, 큰 불황을 맞은 영국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맺은 일종의 신사협약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이 중간에 서서 빚을 진 기업과 채권 은행들의 협상을 이끌었다. 어려운 기업엔 빚을 일부 탕감해 주기도 했다. 채권단이 협의해 전문가를 경영에 투입시키기도 한다. “일단 살고 보자”는 기업과 “일단 살려서 나중에 빚을 받아내자”는 채권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와 채권단이 벌이고 있는 채무 조정 협상도 이런 개념이다.



 ‘서울 어프로치’의 차이점은 중간에 중앙은행 대신 위원회가 섰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당장 워크아웃을 주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주도했다간 ‘자율적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이 훼손된다. 1998년 6월, 기업구조조정위원회가 민간 기구 형식을 빌려 출범한 건 그래서다. 나는 한국종합금융 사장을 지낸 국제금융 전문가 오호근씨를 위원장으로 추천했다.



 위원회는 워크아웃 기업을 일일이 현장 방문했다. 경영진과 직원들을 면담해 회생 의지와 가능성을 체크했다. 확신이 서면 채권단을 설득했다. 채권단끼리 이해가 갈릴 때가 많아 위원회의 판단은 종종 큰 위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워크아웃은 기업 구조조정의 강력한 무기가 됐다. 당시는 파산법이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았을 때다. 부도 기업은 파산 또는 법정관리로 처리하는 게 보통이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모든 채권을 동결하고 경영진을 무조건 갈아치웠다. 한두 기업이 쓰러질 때라면 이런 방식도 가능하다. 그러나 하루 수백 개 회사가 쓰러지고 굵직굵직한 기업이 하루가 멀다 하고 넘어가는 상황에선 작동 불가능했다. 워크아웃은 달랐다. 기존 경영진이라도 실력이 있으면 계속 경영을 맡기고 빚을 깎아주는 것은 물론 신규 자금까지 지원했다.



 대우 그룹도 워크아웃을 통한 채무조정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오호근 위원장은 직접 해외 채권단과 담판을 벌여 대우그룹의 무담보 채무 48억 달러 중 30억 달러를 탕감받았다. 한국 기업이 해외 채무를 탕감받은 최초의 기록이다. 이런 획기적인 채무 조정과 신규 자금 지원 덕에 대우 계열사들은 빠르게 회생할 수 있었다.



 워크아웃 제도가 막을 내린 건 2000년 말이다. 2000년 하반기 2차 공적 자금을 마련하면서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이란 한시법을 만들어 워크아웃을 대체한다. 워크아웃 운영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채권 은행의 간부가 워크아웃 기업 임원으로 취직했다” “워크아웃을 신청한 회사가 채권단에서 지원받은 돈을 로비 자금으로 썼다”는 식이었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였다. 일각에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것이다.



 98년 7월 이후 워크아웃을 신청했던 회사는 대우 그룹 12개 계열사를 포함해 모두 102곳이었다. 그중 60곳 가까이가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채권단과 조정한 채무를 잘 갚고 건강한 회사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구조조정이라고 하면 냉혹한 느낌만 들게 마련이다. 채무 조정과 선의의 경영진 유임 등 어려운 기업의 숨통을 터줬다는 의미에서 워크아웃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구조조정이라 할 만하다. 중간중간 잡음이 없었다면 더 많은 기업에 혜택이 돌아갔을 것이다.





등장인물



▶고(故)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




장면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을 지낸 거물급 야당 정치인 오위영씨의 장남.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종합금융에 입사해 국제 금융 전문가로 맹활약한다. 외환위기 때 워크아웃을 총괄하는 기업구조조정위원회를 맡아 대우 해외채권단과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라자드아시아 회장 시절 영국계 소버린자산운용의 투자자문을 맡아 SK그룹과의 경영권 분쟁에 나서기도 했다. 1991년 소세포암에 걸렸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2006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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