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손병희의 삼전론

중앙일보 2012.03.05 00:43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덕일
역사평론가
3·1운동은 자칫했으면 미수에 그쳤을 수도 있었다. 최남선(崔南善)이 쓴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한밤중에 몰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종로경찰서 한인 형사 신철이 들이닥쳤다. 보성사를 책임지던 이종일(李鍾一)이 황급히 교주인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에게 알리자 손병희는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나와 갖다 주라고 말했다. 종이 뭉치는 5000원의 거금이었는데 그 돈을 주면서 사직하고 만주로 가라고 권유했다고 전해진다.

 3·1운동 주도자에 대한 경성 지방법원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손병희는 3·1운동 직전에 예수교 측에도 5000원을 전달했다. 일제는 이 자금을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 그리고 일본 정부에 건의문을 보내기 위해 미국·상해·일본 등지로 사람을 파견하고 3·1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들 구조에 충당하는 비용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손병희는 일본인 판사에게 ‘독립운동 비용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3·1운동 때 체포된 수원 사람 홍남후(洪南厚)의 조서를 보면 20칸짜리 집의 가격이 400원이고 답 28두락이 3000원이라면서 재산 상태에 대해 ‘생활 유복’이라고 적고 있다. 1두락, 즉 한 마지기는 논은 보통 200평, 밭은 300평을 뜻하는데 5000원이면 46두락, 즉 수원의 밭 1만3800평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손병희가 이런 거금을 연달아 쾌척할 수 있었던 것은 돈에 대한 그의 일관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1902년 국내의 동학교도들에게 삼전론(三戰論)이란 글을 보내온다. 군사로 싸우는 병전(兵戰)보다 더 무서운 세 가지가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의 삼전(三戰)이라는 내용이다. 도전은 정신상태를 높이는 전쟁을 뜻하고, 언전은 이런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는 언론전을 뜻한다. 재전은 모든 사람이 그 재주와 기술을 발달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외국 자본을 막아내는 방책이고 한편으로는 나라가 부유해지는 기술(一以資外禦之策, 一以致富國之術)’을 뜻한다. 돈을 벌되 돈에도 철학을 입히자는 것이 손병희가 주장하는 재전(財戰)의 핵심이었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손병희는 거금 5000원을 거듭 쾌척해 3·1운동을 성사시키고 경영난에 빠진 보성학교(현 고려대)와 동덕여자의숙(현 동덕여대) 등을 인수해 운영할 수 있었다. 손병희가 옥중에서 얻은 병 때문에 1922년 5월 19일 사망하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의 판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금융 자본주의의 병폐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의암 손병희는 이미 110년 전에 재전 이란 치료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