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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렇게 멋진 곳인 줄 알았더라면

중앙선데이 2012.03.03 19:04 260호 36면 지면보기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영화 ‘아메리칸 뷰티’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대가 헛되이 보내고 있는 오늘 이 시간은 어제 죽어간 어떤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소중한 시간들을 얼마나 함부로 낭비하고 있는지.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쓴 극시 『피파 패시스』는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 피파가 1년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 아침 희망에 부풀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7>『우리 읍내』와 손턴 와일더

“계절은 봄이고 / 하루 중 아침 / 아침 일곱 시 /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 하느님은 하늘에 /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매일 쓰는 일기의 첫마디를 이렇게 적었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다.” 아마도 죽은 다음에는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날들이기 때문이다. 손턴 와일더의 3막짜리 희곡 『우리 읍내(Our Town)』는 바로 이런 교훈을 담담하게 전해준다. 1938년 초연된 이 작품은 화려한 무대장치나 극적인 반전 따위는 전혀 없이 그저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줄거리다.

1막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1901년 5월 7일, 일상의 하루다. 동이 트면 열한 살 된 조가 집집마다 신문을 배달하고, 주 2회 발행되는 지역신문의 편집국장 웹 씨네 집에서는 엄마가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낸다. 웹 씨의 큰딸인 에밀리는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숙제하고, 이웃집에 사는 의사 선생님 깁스 씨의 아들 조지는 야구를 한다. 밤이면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이 한창이다.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다면 은행을 새로 짓는데, 정초석에다 뭘 넣을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 연극에서 내레이터 겸 연출가 역할을 하는 무대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 바빌론에는 200만 명이나 살았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왕들의 이름하고 노예 계약서 몇 장뿐입니다. 하지만 바빌론에서도 저녁이면 굴뚝마다 연기가 오르고, 아버지는 일터에서 돌아오고, 그러곤 둘러앉아 식사를 했을 겁니다. 여기 우리처럼요. 저는 이 연극의 대본 한 권을 넣을까 합니다. 천 년 후의 사람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을 알도록 말입니다. 전 그게 베르사유 조약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천 년 후의 사람들이나 지금 여기 우리들이나 자라서 결혼하고 살다가 죽는 거, 그거야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2막은 3년이 흘러 1904년 7월 7일, 에밀리와 조지가 결혼하는 날이다. 딸을 시집 보내는 웹 부부의 서운해하는 마음, 축하해주는 이웃들, 주례를 선 무대감독은 말한다. “살다 보면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훨씬 더 많은 법이지요.”3막은 다시 9년이 흘러 1913년 여름. 무대는 “수많은 슬픔이 서린 곳이자, 언젠가 우리도 와야 할” 마을의 공동묘지다. 에밀리는 둘째 아이를 낳다 죽어 얼마 전 이곳에 묻혔다. 하지만 두고 온 세상이 그리워 무대감독에게 딱 하루만 자신이 살아있던 날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그렇게 해서 열두 번째 생일날로 돌아가지만, 엄마는 음식 잘 씹어먹으라는 잔소리를 하며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고 선물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서로 눈을 마주칠 시간도 없다. 에밀리는 다급하게 외친다.

“엄마, 잠깐만 저를 진정으로 봐주세요. 벌써 14년이 흘렀어요. 저는 조지와 결혼했고 이제 죽었어요. 동생 윌리도 캠프 갔다가 맹장이 터져 죽었잖아요. 그때 얼마나 슬펐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우리 모두 함께 모였어요. 잠시 동안 행복한 거예요. 그러니 우리 한번 서로를 좀 쳐다보도록 해요.”
하지만 엄마는 이 말을 듣지 못하고 선물 얘기만 늘어놓는다. 에밀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저승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도저히, 더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 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아빠, 안녕히 계세요. 똑딱거리는 시계도, 엄마의 해바라기도,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갓 다림질한 옷도, 뜨거운 목욕물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아, 이 세상이 이렇게 멋진 곳인 줄 알았더라면.”
에밀리는 눈물을 흘리며 불쑥 묻는다.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있을까요? 순간순간마다요?”
과연 우리는 오늘 하루가 주어진 데 대해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어느새 겨울이 물러가고 봄날이 시작되고 있다. 오늘 하루는 마음먹고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도록 바라보자.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 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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