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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공모전 3관왕 ‘베토벤 바이러스’ 쓴 홍 자매의 아버지

중앙선데이 2012.03.03 18:55 260호 31면 지면보기
소설가 홍성원의 2008년 모습. [사진 중앙포토]
얼마나 많은 분량의 소설을 썼는가 하는 것이 소설가의 가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겠지만, 홍성원(1937~2008)은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양의 소설을 남긴 몇몇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남과 북』『먼동』『달과 칼』 등 원고지 1만 장 안팎 분량의 대하소설 외에 장편소설만 20권이 넘는다. 평론가 성민엽은 이런 홍성원에게 일찍이 ‘소설 공장’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8> ‘소설 공장’ 홍성원

하지만 홍성원의 ‘소설 공장’에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은 기계가 면발을 뽑아내듯 머릿속에서 술술 풀려 나온 것들이 아니라 온갖 자료와 재료의 집합체이자 결정체라는 점이다. 일부 언론에 소개된 적도 있지만 생전 그가 애지중지하던 뒤주 속에는 평생 모은 각종 자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며, 집 안 곳곳에는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취재노트들이 가득 쌓여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설가가 된 것은 숙명적이었다고 말하곤 했듯, 홍성원이 그처럼 많은 소설을 써야 했던 것은 ‘살아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었다. 홍성원은 경남 합천에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그가 세 살 때 강원도 김화로 이사했다가 8·15 광복 후 당시 공산 치하였던 김화를 떠나 월남했다. 그의 가족은 한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수원에 정착해 홍성원은 수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다. 그처럼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던 까닭은 가난 탓이었다. 더구나 ‘가난한 집안에 자식이 많다’던가, 홍성원에게는 일곱 명의 동생이 생긴다. 56년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3학년이던 58년에는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데다 부모까지 결별해 학교를 중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6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전쟁’으로 가작 입선해 가능성을 인정받은 홍성원은 ‘밥숟가락이라도 줄이기 위해’ 곧장 군에 입대한다. 63년 말 제대를 불과 며칠 앞두고 부대 막사 뒤 골방에서 이틀 동안 쓴 단편소설 ‘빙점지대’가 한국일보 64년도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신춘문예 당선이 소설가로서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그의 가난한 대가족은 창신동 산비탈의 무허가 판잣집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제대해 집으로 돌아온 홍성원에게는 일곱 동생을 포함한 한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할 책임이 지워져 있었다.

신춘문예에 뒤이어 종합월간지 ‘세대’의 창간 1주년 기념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서 ‘기관차와 송아지’가 당선한 홍성원은 그해 연말 동아일보의 50만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서 ‘D-데이의 병촌(兵村)’이 또 당선을 차지해 64년 한 해에만 세 차례 당선되는 흔치 않은 기록을 남긴다. ‘D-데이…’을 응모하고 나서 홍성원은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일곱 동생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예언하듯 말한다. “나는 글 쓰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이다. 내가 50만원을 꼭 타게 될 것이니 힘들더라도 연말까지만 참아라.”

하지만 당선작이 결정됐을 날짜가 지났는데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당선을 확신했던 홍성원은 신문사로 찾아갔다. 과연 ‘D-데이…’이 당선작이었으나 ‘당선통지서’는 반송돼 있었다. 61년 같은 신문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한 전력이 있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필명을 쓴 탓이었다.일평생 ‘월급봉투’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전업작가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이따금 비사교적이며 비타협적이란 소릴 들은 것도 오랜 세월의 전업작가 생활에서 생긴 자기보호본능이었을 것이다. 비굴하지 않게, 올곧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그가 보루로 삼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가 동생들과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면서 끊임없이 주입시킨 것도 그것이었고, 그들이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도록 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두 딸(진아·자람)은 ‘홍 자매’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인기 드라마를 쓴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들과 며느리는 유럽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전업작가의 외로움 속에서 그래도 그에게 위안이 됐던 것은 몇몇 문인과의 끈끈한 우정이었다. 특히 동년배인 황동규·김병익과의 40년 넘도록 이어진 두터운 우정은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황동규와는 같은 시기 군에 입대했을 때 몇 차례 만난 것이, 김병익과는 ‘D-데이…’ 연재 때 문화부의 담당 기자였던 것이 인연의 출발이었다. 세 사람의 우정이 단단하게 다져진 것은 66년 말 김병익과 홍성원이 일주일 간격으로 각각 결혼식을 올렸을 때 황동규의 부친인 황순원이 연거푸 주례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내가 홍성원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3년 봄이었다. 수원 출신인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 평전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초·중·고교를 수원에서 다닌 홍성원은 수원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다. ‘나혜석기념사업회’로부터 평전 청탁을 받았으나 구상 중인 작품이 있고 몸이 시원치 않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그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5년 동안 버티다가 2008년 5월 7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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