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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맑게 하는 효능, 正祖도 반했더라

중앙선데이 2012.03.03 18:01 260호 28면 지면보기
올해는 설날과 대보름이 유난히도 추워 스산했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어 산채의 계절인 봄으로 다가가고 있다. 2월이 고들빼기·씀바귀·물쑥·달래·냉이를 중심으로 한 들나물의 계절이라면, 3월은 삽주·곰취·버섯·두릅·고사리·고비·어아리·도라지를 중심으로 한 산채의 계절이다. 그래서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1816)의 ‘3월조’에도 “전산에 비가 개니 살진 향채 캐어 오게. 삽주 두릅 고사리며 고비 도랏 어아리를. 일분은 엮어 놓고 이분은 무쳐 먹세”라 했다.산채는 한국·중국·일본에서 모두 먹지만 가장 많은 종류를 국·쌈·볶음·찜 등으로 다양하게 조리해 먹고 있는 곳이 우리나라다. 이 중 우리 민족이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 먹었고 먹고 있는 것이 도라지다. 특히 폭넓은 찬품(饌品, menu)의 재료가 되어 있어 밥반찬으로 조리하는 외에도 정과(正果, 煎果)를 만들어 먹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도라지만이 갖고 있는 약성(藥性)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상보의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본 제철 수라상 <13> 도라지

도라지는 길경 또는 백약(百藥)이라고도 한다. 미(味)는 고(苦, 쓴맛) 또는 신(辛, 매운맛)하고 기(氣)는 평(平)하다. 먹으면 손의 태음폐경(太陰肺經)과 발의 소음신경(少陰腎經)으로 들어가 배(船)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체내를 돌면서 폐기(肺氣)를 맑게 하고 인후(咽喉)를 통하게 하는 약재라는 것이다. 또 대황(大黃)과 같이 쓴맛 때문에 인체 밑으로 심하게 내려가는 약 등도 도라지와 함께 먹으면 도라지가 배의 역할을 하여 가슴 속의 가장 높은 곳까지 끌어 올림으로써 약효를 얻게 한다 했다. 손의 태음폐경이란 위→대장→폐→후두→겨드랑이→팔→엄지손가락으로 돌고, 지맥(支脈, 본맥에서 갈려 나간 줄기)은 팔의 하부에서 나뉘어 검지손가락 끝에까지 도달하는 신체를 도는 12경맥(經脈)의 하나다. 발의 소음신경이란 새끼발가락→발바닥→다리 안쪽→신장→방광으로 돌고, 다른 하나는 신장→간→폐→인후→혀까지, 또 다른 하나는 폐(肺)에서 나와 심장→가슴으로 돌아 들어가는 12경맥의 하나다.

도라지가 가진 이런 성질 때문에 옛사람들은 도라지 뿌리를 캐서 말려 두었다가 탕약으로 하여 진해·거담·백일해·폐결핵·천식·해열제 등에 이용했다. 생것은 폐를 보존하기 위한 각종 찬품으로 조리해 즐겨 먹었다. 사임당 신씨의 아들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선생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분이다. 산채와 친숙하게 생활한 까닭인지 ‘전원사시가(田園四時歌)’를 통해 산채시조 한 수를 남겼다.

“어젯밤 좋은 비로 산채가 살졌으니/ 광주리 옆에 끼고 산중에 들어가니/ 주먹 같은 고사리요 향기로운 곰취로다/ 빛깔 좋은 고비나물 맛 좋은 어아리라/ 도라지 굵은 것과 삽주순 연한 것을/ 낱낱이 캐어내어 국 끓이고 나물 무쳐/ 취 한 쌈 입에 넣고 국 한번 마시나니/ 입 안의 맑은 향기 삼키기 아깝도다.”
산채로 만든 나물·국·쌈의 향기와 맛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시조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산채에 대한 향수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

당시의 민중들이 도라지로 만들어 먹던 찬품은 다양하다. 도라지를 삶아 어슷어슷하게 썰어 진간장을 넣고 볶아 깨소금·참기름을 넣고 무친 숙채(熟菜), 껍질 벗긴 도라지를 물에 담가 우려 소금을 넣고 주물러 빨아 베 보자기에 담아 물기를 짠 후 다진 파와 마늘·깨소금·참기름·진간장·초를 합하여 버무린 생채(生菜)(『시의전서』)가 있다. 또 껍질을 벗겨 햇볕에 바싹 말린 것을 곱게 찧어 베 주머니에 넣고 이것을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는 된장 속에 박거나, 또는 생도라지를 물에 담가 쓴맛을 뺀 후 찧어서 물기를 꼭 짠 다음 새들새들하게 말려 된장에 박은 장아찌(『산림경제』) 등이 있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는 정조대왕이 드신 길경숙채·길경잡채·길경생채·길경정과 외에 도라지가 부재료로 들어간 화양적(華陽炙) 등이 기록되어 있다. 지면 관계상 길경생채와 길경정과의 조리법을 간단히 살펴보자. 소금을 넣고 주물러 빤 껍질 벗긴 도라지를 베 보자기에 담아 물기를 짠 다음 참기름과 겨자장으로 버무린 것이 길경생채다. 오랫동안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좋은 도라지를 한번 삶아 버리고 물과 꿀을 합해 삶아 거의 졸았을 때 다시 꿀을 붓고 끈끈하게 엉길 때까지 졸여서 채반에 담아 꿀이 마를 때까지 햇볕에 말린 것이 길경정과다.

조선 왕조에서 약재와 각종 찬품에 쓰였던 도라지는 물론 진공(進貢)의 형태로 백성들에게 부과했다. 강원도는 간성·감영·금성·삼척·양구·영월·원주·이천·춘천·통천·평창·홍주·회양·횡성, 경상도는 군위·비안·의성·인동·칠곡, 충청도는 감영과 회인에서 2월과 3월에 진공했다(『여지도서(輿地圖書)』). 이들 도라지는 물론 산에서 캔 것이기 때문에 산세가 있는 곳이 진공 지역이었다. 요즘은 재배 도라지가 대세다. 게다가 중국에서 들여온 약품 처리한 도라지들이 우리의 식탁을 파고들고 있다. 이런 도라지들로는 산에서 캔 도라지의 약성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길경정과 오랫동안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좋은 도라지를 한 번 삶는다.물과 꿀을 더해 삶아 거의 졸았을 때 다시 꿀을 붓고 끈끈하게 엉길 때까지 졸인다.채반에 담아 꿀이 마를 때까지 햇볕에 말린다.


김상보 한양대 식품영양학 박사.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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