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트렌치코트의 대명사로 한 세기

중앙선데이 2012.03.03 17:41 260호 26면 지면보기
어떤 상표는 상품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된다. 스테이플러가 호치키스로, 셀로판테이프가 스카치테이프로, 미용티슈가 크리넥스로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압도적으로 경쟁력 있는 브랜드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다. 버버리는 트렌치코트를 대표하는 ‘대명사’다. 이미 100여 년 전 그 명예를 얻었다. 우리가 '바바리코트'라고 불렀던 것처럼 20세기 초 영국을 통치한 에드워드 7세는 시종들에게 “내 버버리를 가져와라(Fetch me my Burberry)”라고 명령했다니 말이다.

브랜드 시그너처 <13>BURBERRY

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인 버버리는 1856년 토머스 버버리가 영국 햄프셔주에 연 작은 가게에서 시작됐다. 그는 양치기들이 입던 리넨 소재의 셔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옷감을 발명했다. 개버딘이다. 면직물을 촘촘하게 짠 개버딘은 방수 능력이 좋았다. 1908년의 버버리 광고는 “빗물이 나뭇잎 위의 이슬처럼 흘러내린다”고 자랑했다. 이처럼 개버딘은 가볍고 견고한 데다 통기성 좋고 영국의 습한 날씨에도 적합한 획기적인 신소재였다.

토머스 버버리는 1888년 개버딘으로 레인코트를 만들었다. 뛰어난 실용성과 품질 덕에 버버리 코트는 탐험가ㆍ등산가에게 먼저 인정받았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로알 아문센, 최초의 남극 횡단을 꿈꾼 어니스트 섀클턴이 버버리를 입었다.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중 실종된 조지 맬러리가 마지막 길에 입은 옷도 버버리 재킷이었다.
버버리의 개버딘은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트렌치코트를 낳았다.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참호(trench)에서 가져온 이름처럼 출발은 군복이었다. 1914년 영국 육군성이 새로운 전투 환경에 맞는 장교복을 버버리에 주문하면서 트렌치코트가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코트는 유명세를 치렀다.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개인적으로 구매해 입는 군인이 생겨났다. 바다 건너 미국 장교 사이에서도 붐이 일었다. 1917년 뉴욕 타임스가 ‘트렌치코트의 수요 증가’를 보도할 정도였다.

“군수품 딜러에 따르면 피츠버그에서 주둔 중인 장교들 사이에 영국 트렌치코트 수요가 늘고 있다. 이 코트는 전장에서 입기 좋게 디자인됐다. 넓은 칼라가 달렸고 딱 맞는 허리 아래로는 폭이 넓어진다. 길이는 군인의 발목까지 온다. 뛰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코트 안에서 다리가 움직일 여유 공간이 충분하다….”
트렌치코트엔 계급장을 달기 위한 어깨의 견장과 벨트의 D링이 추가됐다. 메탈 소재의 D링이 달린 목적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수류탄을 매다는 고리로 쓰였다는 설이 있다.

전쟁 후 트렌치코트는 복귀한 장교들의 옷차림을 통해 일반인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모자를 눌러쓴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장했다. 우수에 젖은 영화의 분위기를 타고 옷은 클래식 아이콘이 됐다.
보그가 ‘위키피디아’를 벤치마킹해 만든 패션백과사전 ‘보그피디아(voguepedia)’엔 이런 말이 있다.

이번 시즌 선보인 트렌치코트
‘어떤 다른 옷을 여왕과 시드 비셔스가 함께 입을 수 있을까?(What other clothing item could be worn by both the Queen and Sid Vicious?)’
삶 자체가 펑크였던 시드 비셔스와 그 자체로 대영제국의 상징인 여왕은 양극단에서 가장 영국적 인물이다. 비셔스는 77년 데뷔한 영국의 펑크록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 늘 약에 취해 있었고 무대에서 자해를 일삼는 등 기행을 일삼으며 모든 주류문화에 반(反)했다. 늘 찢어진 티셔츠 차림이었던 시드와 언제나 완전 착장인 여왕. 둘에게 전부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옷이 버버리의 트렌치코트란 얘기다.

버버리 수석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트렌치코트의 힘을 이렇게 풀이했다.
“트렌치코트의 비결은 패션 아이템으로 디자인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녀 모두에게 어울리는 기능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옷으로 진화하면서 세월을 견뎌 왔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