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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영화를 캐스팅하다

중앙선데이 2012.03.03 17:39 260호 24면 지면보기
영화라 하지 않고 굳이 ‘필름’이라고 하는 건 대부분 분량이 10분 미만으로 아주 짧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유명 감독이 아무리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한들 광고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원래 명품 브랜드들은 오랫동안 광고를 하지 않았다. “광고가 명품을 싸구려로 전락시킨다”고 생각해서였다. 루이뷔통이나 구찌 등이 약간의 잡지 광고를 했고, 샤넬이나 이브생로랑이 향수·화장품 광고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광고와 예술 사이 ‘패션 필름’

변화를 가져온 건 조르지오 아르마니, 랄프 로렌, 캘빈 클라인 등 1970년대 급부상한 디자이너들이었다. 이들은 최고의 사진작가와 수퍼모델을 섭외해 광고 사진을 찍었고, 이를 패션지와 예술 잡지에 실었다. 치열해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광고를 피할 수 없다면 광고를 예술로 승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87년엔 샤넬의 카를 라거펠트가 직접 광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다른 브랜드들이 뒤를 이었다. 독특한 컨셉트와 참신한 표현법으로 찍은 패션 화보는 미적으로도 뛰어났다. 고급스러운 느낌을 선사하는 명품 브랜드 광고는 제품과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얻었다.이런 ‘패션 사진’의 3차원 버전이 ‘패션 필름’이다. 최고의 감독을 섭외해 광고의 흔적을 지우고 예술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패션 사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탄생 배경엔 차이가 있다. 사실 ‘패션 필름’의 탄생은 패션 사진보다 뮤직비디오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유튜브와 SNS...기술이 낳은 새 장르
1981년 8월 1일 개국한 미국의 음악전문 채널 MTV는 첫 번째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뮤직비디오를 선보였다. 청각 예술인 음악이 시각 매체로 옮겨가면서 ‘뮤직비디오’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결정적 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패션 필름이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분수령이 있었다. 유튜브와 SNS 등 새로운 매체의 발달이다. 이전에도 영화적 시도가 없던 건 아니지만 극장·방송 외에 상영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하게 생기면서 패션 필름 러시가 시작됐다. 발 빠른 건 가죽제품이나 의류보다 구매층이 넓은 향수였다. 2004년 샤넬은 영화 ‘물랑 루즈’의 버즈 루어만 감독이 연출하고 니콜 키드먼이 출연하는 ‘3분짜리 영화’를 제작했다. 광고지만 감각적인 영상으로 화제가 됐다. 이듬해엔 프라다도 리들리 스콧에게 의뢰해 ‘선더 퍼펙트 마인드’라는 제목으로 5분짜리 ‘단편’을 제작했다.

이즈음만 해도 만들어진 필름을 볼 수 있는 마땅한 창구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한참 뜸하더니 2010년 거장들의 향수 광고용 단편이 쏟아져 나왔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샤넬의 ‘블루 드 샤넬’, 프랭크 밀러는 구찌의 ‘길티’, 가이 리치는 디올의 ‘디올 옴므’, 소피아 코폴라는 ‘마이 디올 셰리’를 찍었다. 이제야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유튜브와 SNS를 활용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TV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상에 친숙한 세대가 등장했고, 미래 고객인 이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브랜드들이 절감했을 것이다. 영상이 전달하는 생생하고 입체적인 이미지의 중요성과 이종(異種)의 만남이 만든 차별성도 알게 됐을 것이다. 홍익대 패션디자인학과 간호섭 교수는 “미술 작품과의 콜라보레이션도 장르 간의 크로스 오버지만 정지화면의 힘은 약하다. ‘모션 픽처(motion picture)’라는 영화의 특징은 이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말했다.

여성 시리즈, 무성영화도 등장
향수에서 시작된 ‘패션 필름’ 바람은 전방위로 확산됐다. 지금 웬만한 가수들이 다 뮤직비디오를 찍는 것처럼 웬만한 브랜드는 영화 한 편씩은 찍는다. 룩북을 영상으로 옮긴 ‘움직이는 패션 사진’도 있고, 분명한 스토리나 주제를 갖고 진행하는 시리즈도 있다.미우미우는 여성과 패션을 주제로 한 ‘Women’s Tales’ 시리즈를 3편 선보였는데 모두 여성 감독이 찍고, 여성이 출연하는 영화였다.

디올은 ‘LADY’ 시리즈 4편을 선보였다. ‘라비앙 로즈’의 올리비아 다한, 데이비드 린치, ‘헤드윅’의 제임스 캐머런 미첼 등 영화감독이 마리옹 코티아르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영화를 찍었다. 이들 영화엔 물론 브랜드의 의상과 핸드백이 등장하지만 노골적으로 제품을 강조하지 않는다. 간호섭 교수는 “브랜드 영화라고 해서 모델이 대놓고 제품을 보여주는 건 유치하고 촌스러운 방법”이라며 “직접적인 마케팅은 레드 카펫 협찬 등을 통해 충분히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활용한다”고 말했다.

화보를 직접 찍었던 샤넬의 카를 라거펠트는 영화도 직접 찍는다. 지난해 5월 크루즈 컬렉션 무대에서 단편영화 ‘A Tale of a Fairy’를 상영했다. 상류층의 허세와 고독을 보여주는 완결된 이야기를 약 30분 분량에 담은 그야말로 ‘단편영화’였다. 보름 전에는 새로운 핸드백 컬렉션인 ‘보이 샤넬’의 캠페인 필름 ‘My New Friend Boy’를 발표했는데, 흥미롭게도 올해 아카데미를 휩쓴 ‘아티스트’처럼 무성영화로 제작했다.광고를 넘어 평가받을 만한 실험도 있다. 가레스 퓨의 2011년 봄·여름 컬렉션이다. 그는 모델들의 캣워크로 선보이는 대신 미리 제작한 필름으로 스크린에 띄웠다. “옷에 집중할 수 없다”는 비판이 대다수였지만, 그는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가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완전하게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언젠간 파라마운트 옆에 구찌나 펜디?
최근 까르띠에와 루이뷔통이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은 또 새롭다. 지난달 29일 까르띠에는 전 세계에서 동시에 시사회를 열었다. 3분30초짜리 영상물 ‘까르띠에의 여정(L’odyss<00E9>e de Cartier )’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아주 짧은 분량인데도 스페인·이탈리아·파리에서 촬영됐고, 실사 같은 3D 애니메이션을 선보였다. 브랜드의 상징인 팬더(표범)를 전면에 내세워 분위기와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방점을 뒀다. 이 영상도 다른 패션 필름처럼 페이스북 등을 통해 공개됐는데, 특이한 건 조만간 TV 광고로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TV라는 전통 채널을 사용하는 것도, 명품 브랜드 최초로 TV 광고를 한다는 것도 새로운 반응을 기대하게 만든다.

루이뷔통은 영화만이 아니라 아예 극장을 가졌다. 올해 1월 로마의 오래된 극장을 리모델링한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면서 상영관을 남겨뒀다. 카페나 레스토랑, 콘서트 홀, 서점, 갤러리를 함께 둬서 복합문화공간으로 매장을 확장하는 시도는 여럿 있었지만, 극장이 들어간 건 처음이다. “지속적으로 독립영화를 상영할 계획”이라는 루이뷔통은 첫 번째 상영작을 제작했다. 과거의 아날로그식 영화 스태프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핸드메이드 시네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패션 담당 기자인 바네사 프리드먼은 로마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을 보도하면서 흥미로운 추측을 내놨다. 일단 그가 보는 현재의 상황이란 이렇다. 명품 업계는 셀레브리티 협찬을 넘어 ‘브랜드의 셀레브리티’를 만들어 낼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또 필름은 패션의 강력한 매개체가 됐다. 자, 여기서 그의 추측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파라마운트·유니버설 옆에 나란히 붙은 구찌나 펜디를 보는 것도 시간문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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