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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새옷 입고 봄마중 나갈까

중앙선데이 2012.03.03 14:33 260호 17면 지면보기
이정선과 박인희의 앨범. 사진 가요114 제공
도시에서는 계절을 민감하게 느끼기 힘들다. 그저 건물의 난방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변화를 느낄 뿐이다. 서울내기로 서른이 넘어 시골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선명하고 강렬한 계절 감각이었다. 어쩌면 사계절의 느낌이 이토록 다를 수 있는지! 특히 겨울 지나고 봄이 오는 계절은 정말 황홀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고서야 노래와 시, 관행적 표현 속에 녹아 있는 옛 사람들의 자연 감각이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컨대 ‘봄눈 스러지듯’ 같은 표현 말이다. 시골에는 논밭에 겨우내 눈이 쌓여 있다. 그런데 늘 그럴 것 같았던 허연 산들이 어느 틈에 흙빛으로 바뀐다. 봄눈이 스멀스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 경칩 부근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개구리들이 일제히 짝짓기 소리를 낸다. 정말 신기하다.

이영미의 7080 노래방 <47> 봄소식

우리 세대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들은 본격적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자연 속 생활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지은 노래에는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은 제대로 공감할 수 없는 표현들이 넘쳐난다.
“버들강아지 눈 떴다 봄 아가씨 오신다 / 연지 찍고 곤지 찍고 꽃가마 타고 오신다”(‘봄 아가씨’, 김영일 작사, 한용희 작곡)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 병아리 떼 뿅뿅뿅뿅 놀고 간 뒤에 /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봄’, 오수경 작사, 박재훈 작곡)

버들의 눈은 겨우내 딱딱한 껍질을 쓰고 있다가 날이 풀리면 복슬복슬 털을 드러낸다. 서울에 살면서 이미 눈 뜬 꽃꽂이용 버들강아지를 해마다 샀지만, “눈 떴다”라고 환호할 만한 광경은 시골에서야 본 것이다. ‘봄’의 시선 흐름도 시골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봄눈이 녹았어도 초봄의 논밭들은 한참이나 마른 풀들로 누렇고 푸른빛은 요원해 보인다. 날이 푸근해지면서 닭이 병아리를 까고, 아이는 아장거리는 병아리 뒤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땅만 보고 다니다가 문득 마른 풀을 비집고 그 밑에서 솟아나온 미나리 싹을 발견한다. 겉은 마른 풀이었지만, 이미 속에서는 미나리들이 자라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초봄에 가장 먼저 솟아오르는 초록색 미나리와 달래를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경이로운 기쁨의 경험이 없는 도시인들이 어떻게 이런 노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도시에서 살아온 청년문화 세대들의 노래에 나타나는 봄은, 자연과 함께했던 위 세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온다네 /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 어차피 찾아오실 고운 손님이기에 / 곱게 단장하고 웃으며 반기려네 / 하얀 새 옷 입고 분홍 신 갈아 신고 / (하략)”(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 1974, 김기웅 작사,작곡)

이 시대 노래 중 초봄 느낌이 가장 선명한 작품이다. ‘세월이 가면’을 부를 때는 늦가을의 ‘서늘한 가슴’을 느끼게 했던 박인희의 목소리는 어느새 초봄의 감각으로 통통 튄다. 긴 생머리에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포플린(이 세대에겐 ‘뽀뿌린’이라 해야 감이 팍 온다) 블라우스에 플레어스커트(이 역시 ‘후레아스커트’가 더 익숙하다)를 나풀거리며 뛸 듯이 걸어오는 여자를 떠올리게 한다. 시골의 생활감각이 없으니 봄의 느낌은 분홍 신 같은 의상이나 아지랑이 정도에 그치지만, 이제는 ‘조붓한 오솔길’ 같은 말조차 사라져가고 있으니 그나마 향수를 느끼게 하는 노래다.

“저 넓은 들판에 파랗게 새 봄이 왔어요 / 가로등 그늘 밑에도 새 봄이 왔어요 / 모두들 좋아서 이렇게 신바람 났는데 / 아이야 우리 손잡고 꽃구경 가자꾸나 /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 개나리 진달래 잠 깨어 모두들 노래 부르네 /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우리의 마음속에도 /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이정선의 ‘봄’, 1979, 이정선 작사,작곡)

제목으로는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지만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하는 대목을 들으면 누구나 따라 할 정도로 익숙한 노래다. 음악적 감각으로는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이정선이 이 노래를 약간 예스럽고 유치한 5음계와 쿵짝쿵짝의 리듬으로 지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봄 봄 봄 봄’ 부분을 ‘도미솔도’로 처리하는 이 단순 명쾌함이야말로 봄의 산뜻한 느낌을 집약한다.

하지만 가사는 참 별 볼일 없다. 도시 청년들에게 봄의 상상력은 꽃구경과 봄비 정도에서 맴돈다. 오히려 다소 신선한 대목은 오히려 ‘가로등 그늘 밑’에 봄이 왔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가 가로수 밑에서 잎사귀 사이로 가로등을 바라보며 초가을을 느끼는 시선을 드러내는데, 이 노래 역시 가로등 그늘에서 봄을 느낀다. 역시 아스팔트 세대들이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 대중가요 관련 저서로『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광화문 연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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