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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기예프 맨손 지휘로 다진 근육질 사운드

중앙선데이 2012.03.03 14:31 260호 16면 지면보기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말하기를 오케스트라는 신비이고 하나의 악기다. 누가 리드를 하느냐에 따라 사운드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의 육체를 사용해 음악을 뜻하는 대로 형상화하는 것이 지휘자의 역할. 2월 27일과 28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런던심포니의 내한공연은 그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자리였다.
쉴 틈 없이 팔 위치를 바꾸어서 일견 지시 타점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평가받는 현 수석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수수한 이미지의 런던심포니를 장악하고 거뭇거뭇한 빛깔로 착색된 반응력 좋은 오케스트라로 탈바꿈시켰다. 차이콥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은 변화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27일 콘서트 오프닝 곡이었다. 근육질 음향으로 질풍같이 몰아붙이는 격돌의 테마와 끈적끈적한 촉감으로 휘감는 사랑의 테마가 수직으로 활강하고 교차했다.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2월 2728일 예술의전당


데니스 마추예프는 프로코피예프 피아노협주곡 3번에서 가공스러운 파워로 객석의 시선을 자신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팔목에 무쇠 스프링을 두른 듯 강력한 터치,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스피디한 옥타브 연타,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음량. 오른손을 건반에서 뗄 때마다 공중을 찔러대며 마추예프는 온갖 초절정 테크닉을 마음껏 과시했다. 야수의 무자비한 손길에 지배된 피아노 주위는 뜨거운 불바다가 됐다. 앙코르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그리고리 긴즈부르크가 피아노용으로 편곡한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중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 마추예프가 즐겨 선택하는 소품으로 난폭하게 질주하다 아찔한 글리산도로 폭발하는 연주에 현기증을 일으킨 사람도 있으리라.

메인 프로그램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게르기예프는 이 작품을 두꺼운 철과 굵은 사슬로 묶어 주조했다. 일반적인 서구 오케스트라의 경우와 달리 콘트라베이스 여덟 대를 무대 왼쪽에 세운 러시아식 배치법이 주효했다. 스테이지는 묵직한 중저음으로 진동했다. 억센 악센트와 폭넓은 다이내미즘을 전면에 내세우는 게르기예프의 쇼스타코비치는 선동적이고 발작적이며 장렬했다.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신음하고 오열하는 3악장이 검붉은 피로 흥건했다. 현 섹션과 관 섹션의 아귀가 정확하게 맞지 않는 게 단점이었다. 앙코르로 선사한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몬테규와 캐풀렛’도 연주가 대담무쌍했다.

두 번째 날인 28일 콘서트는 브리튼의 네 개의 바다 간주곡으로 출발했다. 지난해 본토 출신 지휘자들이 이끈 국내 오케스트라 두 팀의 연주에 비해 색감이 몇 곱절 진했다. 곡 배경이 영국 제도에서 유럽 내륙의 흑해로 옮겨진 듯했다. 이어지는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협주곡 1번은 사라 장의 앙칼진 접근이 귀를 자극하는 독특한 열연이었다. 현을 할퀴어대는 거친 활 놀림이 히스테릭한 곡조와 묘하게 어울렸다. 잡음이 많이 섞여 있어 향후 다른 작품의 연주가 우려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은 호불호가 완전히 나뉠 개성 만점의 연주였다. 음표의 충직한 재현에 중점을 두는 추세에서 비켜나 게르기예프는 극단적인 주관을 실천했다. 상당수 청중은 당혹스러워 했고, 필자는 흥미로웠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판에 박힌 음악은 음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지휘자는 1악장과 4악장에서 감상적인 선율이 흘러나오는 부분마다 긴 쉼표를 집어넣고 템포를 뚝 떨어뜨려 멜로디를 아주 천천히 탐닉했다. 강약과 속도를 세세하게 조정했다. 3악장의 화력은 일부러 낮추어 클라이맥스로 오인되는 것을 원천 봉쇄했다. 음표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느리디 느린 피아니시모로 침몰하는 피날레가 진정한 ‘비창’의 절정이라는 걸 표현했다. 다만 이것이 숙연한 감동으로 연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판정을 유보하겠다.



글리산도
높이가 다른 두 음을 계속해 연주할 때, 첫 음에서 다음 음으로 진행할 경우 두 음 간에 잠재하는 모든 음을 거쳐서 끝의 음에 이르는 주법. 피아노에서는 손가락으로 건반 위를 미끄러지게 해서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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