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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짓는 건 생각이 멈추는 공간

중앙선데이 2012.03.03 14:16 260호 8면 지면보기
1 2008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 설치한 캐스린 구스타프슨의 조경 작품 ‘천국을 향하여’. 사진 Grant Smith2‘천국을 향하여’. 사진 구스타프슨 기스리 니콜 3‘천국을 향하여’. 사진 Grant Smith
옥상정원이 딸린 12구역의 아파트에서는 파리 시내 가장 큰 녹지인 뱅센 숲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조경가의 집으로 더없이 훌륭한 위치였다.
“오랫동안 근처의 작은 아파트에 살다가 2년 전 이 집을 구했어요. 이렇게 탁 트인 전망을 매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 전 미국 시애틀 인근의 야키마라는 사막지역에서 태어나 광활한 대지와 아름다운 산을 보며 자랐어요. 심지어 집에도 3면에 창문이 있어 늘 바깥 경치를 18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었죠. 그때의 경험이 제 조경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런 환경에 살게 되어 기쁩니다.”실제로 구스타프슨은 자신의 조경작업에서 대지의 전반적인 형태를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섬세하게 조형된 땅이 중심이 되는 단순한 디자인을 많이 선보여 평론계에서 “가장 웅장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대지 조각”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세계 조경업계 대모 캐스린 구스타프슨을 만나다


-미국인인 당신이 어떻게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나요. 또 조경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원래 뉴욕에서 패션을 전공했습니다. 졸업하고 파리에 있는 회사에 취직되는 바람에 20대 초반 이리로 왔고 그 후 7년간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했죠. 하지만 패션계는 고달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느 분야건 그 정도 어려움은 있게 마련인데, 그때는 너무 지쳐 겨울 한 철을 시애틀 부근 해안지방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연히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란 학문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게 제가 가야 할 길이란 직감이 왔어요. 그래서 파리로 돌아와 조경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이듬해인 1980년 조그마한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사진 Davol Tedder
-사무실이 런던과 시애틀에 있죠.
“네, 파리는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라 익숙하기 때문에 계속 살고 있고요.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로 97년 사무실을 런던으로 옮겼어요. 국제 프로젝트가 들어오는데 파리에서 영어를 잘하는 직원들을 구하기가 힘들었고, 잦은 파업과 긴 휴가 등으로 생산적이지 못했거든요. 제 사무실이 있는 도시에 살지 않는 건 유감이지만 다행히 좋은 동업자들을 만나 회사를 잘 유지하고 있어요. 99년 설립한 시애틀 사무실 역시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하고 있는데, 환태평양 지대에 위치한 도시답게 매우 다양한 문화배경을 가진 직원들이 포진하고 있어요. 양쪽 사무실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만 15가지쯤 돼요. 런던 사무실은 주로 유럽과 중동, 시애틀 사무실은 북미·남미·아시아 지역의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4 런던 하이드파크 내 다이애나 왕세자비 추모 분수. 사진 Jason Hawkes 5 다이애나 추모 분수. 사진 Helene Binet6 뉴욕 미국자연사박물관 로스 테라스. 7 암스테르담 웨스터파크 구역 문화공원.
-최근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런던 사무실은 얼마 전 런던 울위치 광장을 완공했습니다. 올가을 착공하는 스페인 발렌시아의 중앙공원과 이탈리아 밀라노의 도시생활공원을 설계 중이에요. 시애틀에서는 워싱턴DC에 위치한 국립 아프리칸·아메리칸·역사문화박물관 주변 조경을 설계 중이고, 역시 워싱턴DC에서 ‘시티센터DC’라는 대규모 도심 개발 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여섯 블록, 약 4만㎡에 걸쳐 고급 주거, 상업, 업무 단지를 조성해 도심의 밀도를 높이고 상권을 부흥시키는 프로젝트입니다.”

-공공장소를 설계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요. 작업할 때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나요.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제가 창조하는 공간이 아주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질감 없이 마치 늘 거기 있었거나 그 지역에서 자생한 듯한 풍경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꼭 도발적인 디자인만이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주변 경관에 녹아든 조경도 충분히 존재감이 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10 암스테르담 웨스터파크 구역 문화공원.
-주변 경관에 녹아든’ 디자인을 추구한 결과 당신의 작업은 대부분 단순하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단순하고 평온한 공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로 시민광장, 공원과 같이 도시 속의 ‘정지 지점(stop point)’ 역할을 하는 곳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항상 많은 양의 정보를 쏟아내고, 혼잡하고, 역동적인 도시 안에서 시민들이 잠시 생각과 듣기를 멈출 수 있는 곳, 다른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뇌를 정화하는 곳이랄까요. 그런 기능을 하는 장소가 복잡하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또 점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든 프로젝트에 이런 디자인을 적용하는 건 아닙니다. 특정한 활동을 위한 장소라면 그 목적에 맞게 설계해야죠.”

-스스로 역작이라 여기는 작업은.
“대중적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제 스스로 제가 도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여기는 작업이 몇 있습니다. 89년 설계한 프랑스 에브리 시내 중심의 ‘인권광장’이 그중 하나입니다. 이 광장 바닥을 화강암 포장재로 마감하고 그 사이사이에 가느다란 물줄기가 분사되는 워터젯을 설치했어요. 물을 틀면 분수가 되고 잠그면 평범한 보도가 되어 공간을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죠. 보도블록에는 미끄럼 방지 표면처리를 해서 분수가 작동될 때에도 걸어다닐 수 있게 했어요. 도시의 보도가 시민들의 놀이 상대가 된 최초의 예였는데, 당시엔 파격적인 실험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현대 도시 조경에서 이 워터젯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97년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 앞에 만든 5㎜ 깊이의 얕은 못 역시 그 위를 걸어다닐 수 있게 했어요. 물론 잠글 수도 있고요. 이 물의 막(water scrim)은 그 이후 저의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사용했습니다. 물은 생명이자 움직임이고, 사람들을 그 주변으로 모아 관조하고 몰입하게 하는 매력이 있어 저의 조경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아울러 마르세유 입체교차로 터널, 몰브라 빗물저수지와 같은 프로젝트들은 터널과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파낸 흙을 재사용해 언덕을 쌓고, 땅의 형태를 바로잡아 새로운 지형을 창조해낸 대지 이동(land movement) 작업이었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현대적 상황에 맞게 조경을 진화시킨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워터젯과 얕은 물의 막은 이제 당신 조경의 시그너처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혹시 식물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당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나요.
“전 주로 작품의 전반적인 개념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식물로는 제 시그너처 스타일이 없습니다. 식물은 주로 원예전문가에게 맡기죠. 그리고 공공장소에 심는 식물은 개인 정원에 심는 것과 많이 달라요. 공공 정원은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개방된 장소이므로 유지관리하기 쉽고 생명력이 강한 식물을 주로 선정하게 되지요. 해당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기도 하고요. 결국 저의 개인적 기호와 상관없이 그 지역을 잘 이해하고 있는 원예전문가와 협업해 그 땅의 자생식물을 주로 심습니다. 그게 또 자연의 이치인 것 같아요. 보기에도 주변 환경과 가장 잘 어울리고요.”

-개인 정원을 만들고자 하는 독자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물론 저도 식물을 무척 좋아해서 많이 기르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전 무엇을 어떻게 심는가보다 자라는 식물과의 교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식물은 꼭 어린아이 같아서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보살피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거든요. 처음부터 뿌리를 잘 내리는 튼튼한 나무도 있고, 똑같이 정성을 들이는데도 혼자서만 잘 안 크는 나무도 있고, 해마다 상태가 다르게 피는 꽃도 있고. 그렇게 대상을 관찰하고 돌보고 좋은 환경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게 원예의 묘미인 것 같아요.”

-작업의 영감은 어떻게 얻나요.
“평소 관찰을 잘하는 편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불러오는 물리적 징후들과 인간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 저의 직관과 살면서 받아온 교육도 중요한 밑거름이고요.”

-조경가로서 시민들이 살기에 좋은 도시는 어떤 곳인가요.
“시민들이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도시요. 충분한 녹지, 양질의 문화시설, 필요할 때 곁에 있는 상점들, 좋은 학교, 편리한 교통과 같은 조건이 충족돼야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겠죠.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해서 그 도시에 사는 것만으로 좋은 안목을 기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거예요. 제가 보기에 파리·시카고·워싱턴 DC가 비교적 이런 조건을 갖춘 도시 같아요.”

-2008년과 2010년 서울을 방문하셨죠. 인상이 어땠나요.
“어디서나 산이 보이는 것이 가장 좋았어요. 도시에서 먼 경치를 보며 항상 자연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 건 다른 대도시에서 할 수 없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거대한 한강을 중심으로 전개된 도시 개발 역사도 대단했고요. 서울 강남에서 본 첨단 현대건축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최첨단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 전선과 통신선 지중화 공사가 안 된 곳이 더러 있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공공부문의 인프라 구축과 민간부문의 개발 사이의 조정 문제일 텐데 앞으로 차차 향상되겠죠.”

인터뷰 내내 어떤 질문에도 주저 없이 명료하게 답한 대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매일 아침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어나는 것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도 재미있고 힘차게 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종일 그 긍정의 에너지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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