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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시민운동가들이 뛰어들면 정치가 나아질까

중앙일보 2012.03.03 00:35 종합 32면 지면보기




4월 총선을 앞두고 시민운동가들이 대거 정치판으로 뛰어들고 있다. 올 선거판에서 주목할 만한 새 흐름이다. 찬성론자들은 신선한 시민세력이 기성 정치판을 새롭게 바꿀 것이라며, 이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론자들은 시민운동의 정치오염을 경계하면서, 참여보다는 외곽에서의 감시라는 본연의 기능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시민운동과 정치를 구분하던 시대는 지났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2012년 한국의 정치지형은 2008년 미국과 매우 유사하다. 그 당시 오바마 선거운동이 힐러리 진영에 비해 왜 더욱 역동적이었고 더 나은 희망을 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을까. 오바마는 정치를 넓은 의미의 시민적 운동으로 간주한 반면 힐러리는 정치를 워싱턴 엘리트들의 게임으로 협소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자신은 지금 정치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혀 측근들을 경악하게 했다. 그가 옳음은 당선으로 증명됐다.



 왜 지금 한국의 여야 정당들은 지속적으로 희비극을 반복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훌륭한 여야 의원들도 많지만 동시에 적잖은 정치인들이 공적·시민적 가치를 우선시하기보다는 정파 간 사투나 생계 수단으로 정치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의 천박한 교육환경에서 스티브 잡스가 탄생하기 힘든 것처럼 한국적 정치지형에서 시민운동가 오바마는 등장할 수 없다. 오바마는 계파에 줄 서지도 않고 저녁엔 집에 가서 책을 보기 때문이다. 이런 오바마를 위해 악을 써줄 공천심사위원은 없다.



 시민운동가들의 정치 진출에 대한 반대론자들의 진정성과 현실성을 믿기 힘들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여야의 최종 공천 회의에 참관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시장판의 생생한 현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민운동가들의 진출에 대한 비판은 결과적으로 현실정치에서 기성 정치인의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준다. 사실은 시민적 가치를 훈련한 이들이 너무 많이 진출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진출했기에 정치판의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는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시민과 ‘공감과 동행’의 정치를 전개하기 어렵게 돼 있다. 4년간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는 국회의원 선출 제도 등의 문제나 시민적 시야를 훈련받지 못한 여야의 정치 문화는 너무나 심각하다.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정치지형이 창조된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온·오프 시민들의 집단지성에 의한 일상적 정치가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당과 시민운동의 굳은 벽이 이미 무너졌다. 정당이 내부에서 정치하고 시민운동은 외부에서 견제만 한다는 이분법적 이론은 20세기 낡은 유물이다. 여전히 외부에서 견제하는 시민운동도 존재해야 하지만 동시에 시민적 가치를 가진 이들이 정당의 안팎에서 시민과 정당을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 정치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 ‘시민정치가(citizen politician)’ 박원순의 등장은 전 지구적인 시민정치 등장의 징후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시민운동가들이 반드시 시민정치가로서의 자격이 되며 제도권 정치에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시민운동과 제도권 정치는 공적인 혼은 같지만 미시적으로는 다른 작동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경선과 정치 과정 등을 통해 철저히 검증하고, 장기적으로 시민정치가로서 훈련시켜 나갈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당장 눈앞의 선거와 이해관계만 생각하다가 한국의 여야 정당들은 장기적 미래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시민정치가의 대대적 진출이 시민운동을 고사시킨다? 천만에. 그건 기존의 협소한 시민운동의 관성을 지속할 경우에만 그렇다. ‘시민행동주의’의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는 ‘2030’ 세대와 전면 결합하고, 교육제도 등 다양한 제도적 환경을 바꾸면 제도권 정치와 시민운동의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정치참여보다 정치감시가 더 필요하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적 ‘압축성장’은 시민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국가가 정치사회와 경제사회를 독점했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시절에는 시민사회의 공간이 없었지만, 1987년 민주화 전후 시민운동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89년 경실련, 93년 환경운동연합, 94년 참여연대의 탄생이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신호탄이었고 현재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시민단체가 있다.



 얼마 전 시민사회단체의 주요 인사 100여 명이 대거 통합진보당에 입당했다. 이미 박원순, 김기식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 남윤인순 전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등은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시민사회단체 핵심 상근자 출신의 기성정당 입당을 통한 정치참여는 몇 가지 점에서 논란을 일으킨다.



 시민운동은 기본적으로 정치사회·경제사회와 동떨어진 ‘제3 섹터’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권과 기업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감시할 수 있다. 정치권과 경계가 모호해지면 시민단체의 존재 이유가 흔들린다. 이처럼 시민운동세력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시민운동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과 직결돼 있기에 오래전부터 민감한 논쟁거리였다.



 시민운동은 정파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 시민단체가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는 것은 발전된 민주정치 체제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시기상조다. 이념갈등이 정책경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이념과잉’으로 귀결되는 현실에서 시민운동의 정파성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정파적 중립성의 굴레가 엄격하지만 그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정치권을 믿지 못해 시민단체 출신들이 직접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명분은 조급한 발상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겨우 20여 년이 지났을 뿐이다. 정치발전이 낙후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구에 비해 결코 발전 속도가 느리지는 않다. 오랜 민주주의를 경험한 서구 선진국가에서도 정치부패와 정치불신 현상은 나타난다. 답답하다고 조급하게 서두르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시민단체 핵심 인사의 정치 참여는 시민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기에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국민이 보내준 시민단체에 대한 지지와 신뢰가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국민이 직접 투표를 통해 뽑은 정치인과 정당은 비판하면서도 시민단체에는 유독 박수를 많이 보낸 것은 시민운동의 순수성과 진정성 때문이었다. 아직도 묵묵히 봉사하는 수많은 ‘시민봉사적’ 단체들이 ‘시민운동적’ 단체의 정치참여 때문에 피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 운동이 2000년에는 성공적이었지만 2004년에는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를 되새겨봐야 한다. 2004년의 실패 원인은 정치적 정파성의 표출, 성과에 대한 조급함, 그리고 권력화로 인한 자만이었다. 참여연대는 공선협·경실련 등과 함께 공명선거운동, 후보자 검증운동, 정책선거운동 등으로 쌓아 올린 국민적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시민단체들이 선거에서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후보자 검증, 정책·공약 검증, 유권자 참여운동, 부정선거 감시운동 등이 어쩌면 직접 정치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작업이다. 성급한 기성정치 합류는 시민운동의 위기와 분열을 초래한다. 경실련처럼 시민운동은 ‘정파적 중립성’을 고집스럽게 지켜야 한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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