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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미 하원의원이 일본을 기절초풍시킨 까닭은

중앙일보 2012.03.03 00:29 종합 34면 지면보기
정경민
뉴욕특파원
미국 연방하원 외교위원회 산하 아시아태평양소위원회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을 쥐락펴락한다. 게다가 현재 하원은 야당인 공화당 천하다. 위원장인 공화당 도널드 맨줄로 의원의 입김이 얼마나 셀지는 알 만하다. 그는 친일파 의원으로 꼽혀왔다. 같은 일리노이주 출신으로 그의 멘토였던 데니스 해스터트 전 하원의장이 친일파의 태두(泰斗)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일본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폭탄 발언을 했다. 그는 동해 표기와 관련해 “미국은 (동해와 일본해)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선 안 된다”고 말했다.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neutral·동해와 일본해 병기)으로 선회(shift)해야 한다”고 똑 부러지게 밝혔다. 일본으로선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힌 격이었다.



 더욱이 그의 발언은 ‘우발적인’ 인사치레도 아니었다. 그는 뉴욕중앙일보를 비롯한 ‘동해 표기 바로잡기 서명운동’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대표단은 한 달 전부터 맨줄로 비서진과 방문 목적·일정을 조율했다. 맨줄로는 누가 왜 그의 사무실을 찾아오는지 다 알고 ‘준비된 멘트’를 날린 거다.



 아태소위 여당 간사인 에니 팔레오마베가 의원은 한술 더 떴다. 그는 서명운동 대표단에 자신이 총대를 메줄 테니 결의안 상정을 추진해 보라고까지 했다. 달걀로 바위 치는 심정으로 찾아간 대표단이 오히려 계면쩍었을 정도다. 미 정부는 지난해 8월 국제수로기구(IHO)에 ‘동해’를 ‘일본해’로 단독 표기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한 뒤 요지부동이었다.



 그럼에도 아태소위 여야 지도자가 한목소리로 미 정부 정책에 물음표를 단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명분이 뚜렷했다. 일본이 ‘일본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퍼뜨린 건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개시하고부터다.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 망령의 유산인 ‘일본해’란 명칭을 두둔하는 게 온당한가”라는 지적에 여야 지도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명분에 힘을 실어준 건 1만2411장에 달하는 서명용지였다. 정치인이라면 두꺼운 전화번호부 5권에 달하는 서명용지 더미를 못 본 척하기 어렵다. 게다가 지금은 정치의 계절이다. 일본 정부 로비군단의 위력은 막강하다. 그에 비하면 아태소위를 찾아간 서명운동 대표단은 ‘쪽배’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명분과 유권자의 표심만 합치면 쪽배로도 미국이란 항공모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제대로 보여줬다.



 그렇다고 일본을 얕잡아봐선 곤란하다. 뒤통수를 맞은 일본은 지금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데 한국 정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는다. 오죽하면 맨줄로 위원장이 동해 표기와 일본군 위안부 사연을 전해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깜짝 놀랐을까. 혹시 ‘조용한 외교’를 ‘무대책 외교’와 헷갈리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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