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행가 가사처럼 삶 위로하는 게 예술”

중앙일보 2012.03.03 00:04 종합 25면 지면보기
신작 ‘황금의 링-아름다운 지옥’을 앞에 둔 배영환. 그는 “이 공간을 주인공이 없는 텅 빈 도시처럼 연출하고 싶었다.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미술관 플라토]
“사람들은 이 도시에 살려고 오지만, 내가 보기엔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는 것 같다.”(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중)


배영환 15년 회고전 ‘유행가 - 엘리제를 위하여’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지옥의 문’ 이 영구 설치돼 있는 서울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옛 로댕갤러리). 유리 지붕서 햇빛이 쏟아지는 이 전시공간 입구에 난데없이 황금색 복싱 링이 설치됐다. 링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지옥의 문’과 겨루며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포스트 민중미술가, 혹은 공공미술가로 이름난 배영환(43)의 신작 ‘황금의 링-아름다운 지옥’이다. 15년간의 예술적 여정을 모은 중간 회고전 ‘유행가-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작품이다. 지난해 재개관한 플라토가 한국 미술가의 첫 개인전 주인공으로 배영환을 선택했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황금처럼, 도시는 상처만 안기는 싸움터인데도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유인한다. 이 텅 빈 복싱 링은, 사지(死地)가 될 수도 있는 이 도시로 꾸역꾸역 모여들어 보이지 않는 적과 늘 싸워야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해서 로댕의 조수였던 릴케는 일찌기 도시에 대해 위와 같은 글을 남겼고 배영환은 여기에 경도됐다.



깨진 술병 조각으로 만든 샹들리에 ‘불면증-디오니소스의 노래’. 병조각이 ‘아주 럭셔리하고도 궁상맞은’ 장식품으로 재생됐다.
 배영환은 “예술의 본령은 위로다. 유행가처럼 우리와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흰 캔버스 위에 깨진 소주병과 알약, 본드 따위로 ‘물망초’(조용필), ‘크레이지 러브’(팝송) 등 흘러간 옛 노래 가사를 써 붙였다. 1990년대 후반의 ‘유행가’ 연작이다. 버려진 가구의 화려한 자개 장식 등을 이용해 만든 통기타 ‘남자의 길’(2005) 연작으로 권위·성공·가장으로서의 의무 등을 짊어졌으되 젊은 날의 낭만적 꿈을 찾아 일탈하고픈 대한민국 성인 남자들을 위로했다. 유행가를 써 붙이던 깨진 술병은 이어 밤을 잊은 부엉이, 밤을 밝히는 샹들리에로 태어났다. ‘불면증’(2008) 시리즈의 하나로 제작된 이 화려한 샹들리에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 ‘하녀’(2010)에서 지배층에 의해 심신이 철저하게 유린된 하녀(전도연)가 분신 자살하는 도구로도 나온다.



 ‘유행가’ 연작으로 우리 시대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과 꿈을 위무했던 ‘양아치적 감수성’의 이 작가는 최근 철학자가 된 듯하다. 노동집약적 수공으로 시각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던 배영환은 요즘 미술이라는 가시적인 장르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데 도전하고 있다. 전시장의 마지막 작품 ‘걱정- 서울 오후 5:30’은 종소리가 퍼져나가는 흰색의 텅 빈 종루다. 서울 시내 12군데 종각의 소리를 채집해 도시라는 전장에서 살아가는 중생의 번뇌를 위로한다.



 안소연 플라토 연구실장은 “배영환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자생적 감수성이다. 버려진 자개장, 깨진 소주병, 유행가 가사 등 우리 삶에서 나온 재료로 우리의 현실을 얘기하고 있다. 이 정도면 한국 대표 미술가로 내놓기에 손색없지 않나”라며 재개관 첫 한국 미술가 개인전의 주인공으로 배영환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전시는 5월 20일까지. 성인 3000원. 1577-7595.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