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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용맹정진 10년 … ‘스스로 만든 감옥’서 깨달음을 얻다

중앙일보 2012.02.28 00:41 종합 27면 지면보기
성전암(聖殿庵)은 대구 팔공산 중턱 700m 고지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다. 본사(本寺)인 파계사(把溪寺)에서 가파른 산길을 20여 분 걸어 올라가야 닿는다. 이 암자가 선승들 사이에 수행 도량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성철(性徹) 스님의 공이 크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하>

 스님은 속가(俗家) 나이로 40대 중반이던 1955년 처음 이곳을 찾았다. 50대 초반이던 63년까지 8년 남짓 ‘동구불출(洞口不出)’, 즉 절문 밖을 나가지 않고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 경남 통영의 안정사에 딸린 천제굴(闡提窟) 시절까지 합치면 그 세월은 10년에 이른다. 속세의 안목으로 보자면 사내로서 가장 원기 왕성한 10년을 좁디 좁은 암자에서 진리에 이르는 길에 오롯이 바친 것이다.



성전암 시절의 성철 스님. 정확히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알 수 없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지난 8일 오후 성철 스님의 상좌(上佐·제자)인 원택(圓澤) 스님과 함께 성전암에 올랐다. 칠순이 가까운 원택 스님은 힘이 부치는 듯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땀이 날 만큼 오르막이 가팔랐다. 암자에 오르니 멀리 대구 시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전기가 귀하던 60년 전 암자에 들면 주위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은 부산 서면 시장통에서 구해온 철조망을 암자 주위에 둘렀다.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철조망 안쪽에 자물쇠를 채워 스스로를 가두고는 “갇힌 것은 반대쪽”, 즉 세상이라고 선승(禪僧)다운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 해제철이기 때문이다. 눈매가 날카로운 스님 하나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법명(法名)을 밝히기를 거부한 그는 “기도하기 좋은 곳을 찾아 다닌다”고 했다.



성전암 전경. 대구 팔공산의 가파른 산비탈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멀리 대구 시내가 보인다. 성철은 불교가 서양의 학문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현대적인 종교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8년간 암자 바깥 출입을 금한 채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했다. [안성식 기자]
 성전암은 단순히 마음을 가둔 감옥이 아니었다. 애끊는 사연이 있다. 불자(佛者)로서 성철은 대오각성(大悟覺醒), 다시 말해 해탈에 이른 대자유인이었는지 몰라도 자연인 이영주(李英柱·성철의 속명)의 가정사는 기구했다. 성전암은 그 현장이다.



 성철의 출가로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난다. 완고한 유학자였던 아버지 이상언(李尙彦)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의 딸도 훗날 출가해 불필(不必)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졸지에 남편과 딸을 불교에 빼앗긴 부인 남산댁은 딸만은 돌려달라고 사정하기 위해 성전암을 찾았다가 호되게 내쳐진다. “빨리 저거 쫓아내라”는 성철 스님의 호령에 시자(侍者) 스님들이 남산댁을 산 아래까지 강제로 끌고 내려간 것이다.



 일반인의 균형감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아무리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절실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8년 동안 성철 스님은 과연 무슨 공부를 한걸까.



 부산 해월정사(海月精舍)의 천제(闡提) 스님은 성철 스님의 맏상좌다. 성전암 시절 고스란히 성철 스님을 모신 그는 “(성철 스님이) 불교 공부에 새롭게 정진했다기보다 그간 공부한 내용을 현대적인 학문을 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하신 기간”이라고 말했다. “불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가 아니라 얼마든지 현대의 서구 학문에 들어맞을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구해 읽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철 스님이 섭렵한 목록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물리학 서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서적은 물론 시사잡지 타임·라이프 등도 포함된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어(梵語)을 알아야 한다며 제자인 천제 스님에게 이를 공부하도록 한 것도 이 시기다. 제자 스님들은 스님의 성화에 못 이겨 사서삼경도 외워야 했다.



 ‘동구불출 10년’은 67년 해인사에서의 백일법문, 그보다 앞선 65년 경북 문경 김용사(金龍寺)에서의 첫 대중법회 등 기존 불교 법회와는 차원이 다른 성철 특유의 설법으로 이어진다. 불교의 핵심 교리를 담은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상대성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새로움과 해박함에 모두 혀를 내둘렀고 그만큼 불교계에 미친 파장이 컸다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도 통하는 알기 쉬운 설명은 물론 깊은 공부의 소산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생전 성철 스님이 “이 책으로 부처님께 내 밥값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한 책이다. 불교의 유명한 공안(公案·화두)을 모은 후 그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각종 문헌 자료를 제시한 책이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김영욱 책임연구원은 “요즘처럼 DB 자료나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던 시절에 방대한 자료를 정확하게 인용했을 뿐 아니라 공안에 대한 안목과 이해에 관한 한 선사(禪師) 특유의 전광석화 같은 기운이 곳곳에 보인다”고 평가했다. 성철 스님은 웬만한 불교학자도 갖추기 어려운 안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성전암의 한 구석에는 ‘적묵실(寂默室)’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건물이 있다. 성철 스님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 건물에는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이라는 주련(柱聯·기둥에 세로로 써 내린 글귀)이 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부처가 가는 길은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부처마저도 부정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담긴 기개 넘치는 문구다. 인륜(人倫)의 장애쯤 거뜬히 넘어버리고 스스로 자유로워져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이 성전암에는 서려 있었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상>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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