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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대법원이 던진 비정규직 숙제

중앙일보 2012.02.28 00:17 종합 32면 지면보기
김기찬
심의위원
사내하청 근로자를 현대차 정규직으로 인정한 대법원의 최초 판결은 2010년 7월 22일 나왔다. 그해 9월 울산은 사내하청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 문제로 뜨거웠다. 울산 선술집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근로자는 “아들이 정규직 하고, 내가 비정규직 하는 게 좋은데…”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차 정규직이다. 아들은 사내하청 근로자다.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함께 일한다. 그는 “애 키울 땐 투쟁해서 돈 많이 받으면 좋았는데, 막상 은퇴할 때가 다가오니 애 장래가 걱정”이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현대차는 10년 넘게 생산직을 충원하지 않았다. 대신 중소업체에 도급을 줬다. 노조에 밀려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인사권마저 제약을 받자 이런 돌파구를 택한 것이다.



 지난 23일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2010년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비용절감만 따지는 대기업의 인력운용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사내하청 근로자들에겐 대기업 정규직이 될 길이 열렸다. 노동계에선 모든 사내하청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D사 관계자는 “예상하고 있었다. 대비를 끝낸 상태”라고 말했다. 이 회사는 생산과정의 모듈화를 2년여 동안 진행했다. 어지간한 부품은 하청업체에서 제작한다. 본사 공장에선 이를 납품받아 조립만 한다. 사내에 하청업체 근로자를 둘 필요가 없다. 불가피하게 하청업체 근로자를 쓰게 되면 정규직원과 섞이지 않도록 격리한다. 정규직 진입 문에 잠금장치를 더 한 셈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황용연 노사대책팀장은 “기업도 양질의 인력을 직접 확보하고 싶죠. 그런데 한 번 정규직이 되면 경기가 아무리 나빠도 내보낼 수 없고, 인건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오르니 하도급을 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근로자도 이런 점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청근로자를 정규직으로 받아들이면 회사가 엄청난 부담을 떠안을 텐데, 그렇게 되면 기존 정규직이 임금삭감과 같은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현대차 근로자)고 말한다. 노조는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근로자를 쓰는 데 눈을 감아왔다. 경기가 어려울 때 이들을 내보냄으로써 방패막이로 삼았다.



 성균관대 조준모(경제학) 교수는 “사내하청 문제는 기업의 경쟁력과 정규직 노조의 이익이 맞물린 민감한 문제”라며 “대법원에서 던진 숙제에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정규직 세대와 아들 세대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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