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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장군 이사부, 나무 사자 풀어 동해 패권 잡다

중앙선데이 2012.02.26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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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정복 1500주년

삼척시 오분항에 세워진 이사부의 출항 기념비(왼쪽), 우산국 우해왕이 이사부 장군에게 항복하고 벗어던진 투구가 바위가 됐다는 투구바위(가운데). 우산국 도읍지로 추정되는 북면 현포리 고분군. 경사면에 40여 기 고분이 있었으나 10여 기만 남있다. 조용철·예영준 기자 
서기 512년 음력 6월의 어느 날. 높게 출렁이는 파도를 뚫고 울릉도 동남 해안에 군선이 나타났다.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끄는 병선이었다.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 불리는 성읍국가의 본거지였다. 거친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 파도에 단련된 우산국 병사들이 보기에 꼬박 이틀 물길을 달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신라 수군쯤은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다. 더구나 울릉도는 해안선에서부터 깎아지른 절벽이 둘러싸고 있는 천연 요새였다.하지만 신라의 병선에는 ‘비밀 병기’가 숨겨져 있었다. 동해의 물살을 가르며 이사부 장군이 호령했다. “만약 너희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들을 풀어 모두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병사들은 생전 처음 보는 맹수의 모습에 혼비백산했다. 말로만 듣던 사자가 신라 정벌군의 배에 가득 실려 있었던 것이다.



우산국의 우해왕(于海王)은 항복하고 공물(貢物)을 바쳤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항목에 나오는 우산국 정벌 기록이다.'삼국유사'에도 이사부 대신 박이종(朴伊宗)이란 이름으로 기록돼 있을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종’은 이사부의 이칭이다. 신라 왕족인 이사부의 성은 김(金)씨였지만, 어머니의 성을 따 표기한 듯하다는 게 학자들의 해석이다.당시 한반도 사람들에게 사자는 전설 속에만 나오는 상상의 맹수였다. 섬나라 우산국은 물론이고 신라에서도 실물 사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산국 병사들이 뭍에서 건너온 사자를 보고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사부의 정벌군이 병선에 실어갔다는 사자는 실은 나무로 깎아 만든 사자 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이사부는 왜 이런 속임수를 썼을까.'삼국사기'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이사부가 말하기를 우산인은 어리석고 사나우므로 위력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려우니 계략을 써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만들고 전선에 나눠 실었다.(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울릉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은 더욱더 극적으로 이런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신라군의 배에는 덮어씌운 물건들이 실려 있었다. 사자였다. 입에서 불이 두어 길씩 튀어나왔다. 우산국 군사는 사기가 죽었다. 투항의 표시로 큰 깃발을 투구바위에 올렸다. 나팔바위에서는 항복 나팔을 불었다. 이리하여 이사부는 우해왕의 항복을 받았다.(중략) 이사부는 사자 한 마리를 바닷가에 던졌다. 알고 보니 나무로 만든 사자였다. 우산국 사람들은 이사부의 꾀에 속아 항복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울릉도의 전설·민담')

이때 이사부가 두고간 사자가 울릉도 남양항에 있는 사자바위의 화석이 됐다는 전설이다. 사자바위 외에도 울릉도에는 투구바위·나팔바위 등 이사부 전설과 관련된 이름이 붙여진 지형지물이 있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삼국이 정립하고 있던 당시의 한반도 정세,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결정적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512년은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 전성기에 이른 고구려의 팽창기가 막을 내리고, 지증왕·법흥왕을 거쳐 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팽창기의 초입이었다. 삼척·강릉 등 지금의 강원도 동해안 지방은 이 무렵 신라와 고구려가 영역 다툼을 벌이는 접점이 됐다. 박교식 관동대 교수에 따르면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신라가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기폭제가 됐다. 동해안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면서 안전하게 북진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당시 우산국은 고구려의 대일 교섭 항로의 중간 기착점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일본의 통교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고서는 북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라는 진흥왕 시절 황초령·마운령의 순수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6세기 중·후반 함경도까지 진출했고, 한강 유역을 손에 넣었으며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것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우산국 정벌은 150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우산국이 한반도의 판도에 들어오게 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넓은 해양 영토를 갖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사부 정벌 이전 울릉도는 물론 동해 연안까지 왜구가 빈번히 출몰하고 있었다. 만약 일본이 먼저 울릉도와 독도를 장악했을 경우와 대비해보면 이사부의 정벌이 갖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사부학회장인 손승철 강원대 교수는 “이사부 장군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에 편입시킨 동해 수호와 해양 개척의 선구자였다”고 말했다.



권오창 화백이 그린 이사부 장군의 영정. 다섯 차례 문화관광부의 심사를 받은 끝에 지난해 국가표준영정 제83호로 지정됐다. 권화백은 “신라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토대로 고증을 거쳐 문무를 겸비한 30대 후반의 풍모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이사부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왕족인 그는 일찍이 무예를 익혀 벼슬에 올랐고 505년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됐다. 정확한 출생 연대는 기록에 없지만 대략 20세 안팎일 때였다. 실직은 오늘날 삼척 일대로 주(州)는 신라의 최전방 기지다. 군주는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이사부는 지증왕이 고구려의 침공 가능성이 큰 동해안 전략 요충지로 보낸 사람이었다. 신라의 세력 확장에 따라 7년 뒤 주가 하슬라(강릉)로 북상하면서 이사부는 하슬라 군주가 됐다. 우산국 정벌은 이때 일어난 일이다.



541년에는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이 돼 20여 년간 재직했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진흥왕을 보필해 신라의 팽창기를 떠받친 셈이다. 화랑제도가 창설된 것도 이사부가 병부령에 있을 때였다. 529년에는 3000명의 병력으로 가야를 공격했고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틈을 타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70대 노년 시절인 562년엔 대가야 정복에 나섰다. 거칠부가 역사서 '국사'를 편찬한 것도 이사부의 진언에 의해서였다.



이뿐 아니라 이사부는 신라 왕실의 중요 인물들과 혈연관계 또는 개인적 관계로 맺어진 권력자였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와는 오랫동안 연인관계였다. 드라마 ‘선덕여왕’ 덕분에 유명해진 미실은 이사부의 며느리였다. 또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부의 아버지와 신라 불교의 순교자 이차돈의 할아버지는 동일 인물이다. 따라서 이사부는 이차돈의 아버지였거나 삼촌이었다. '소설 이사부'의 작가인 현직 판사 정재민씨는 “이사부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삼국통일의 씨를 뿌린 인물”이라며 “김유신을 넘어서는 신라 최고의 영웅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사부는 여전히 우산국을 정복한 장군으로만 알려져 있다. 교과서나 ‘독도는 우리 땅’을 통해 알게 된 단편적 지식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이사부를 기억하지만, 우산국 정벌과 연관지어서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사부란 인물의 전체 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이처럼 ‘저평가’된 이사부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게 된 것은 최근래의 일이다. 가장 적극적인 이사부 선양 사업을 하고 있는 곳은 강원도 삼척시다. 삼척은 이사부가 출항한 곳이란 인연을 갖고 있다. 이사부 선단의 출항지인 삼척시 오분항에는 2010년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졌다. 2007년부터 해마다 8월에는 삼척시 일원에서 ‘이사부 문화축전’이 열리고 있다. 이 기간 중 이사부에 관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려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권오창 화백이 삼국시대 무인의 복식을 고증한 끝에 이사부의 영정을 완성해 정부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됐다. 비늘 갑옷을 입고 삼환두대도를 든 이사부의 모습은 30대 후반의 나이를 가상해 그린 것이다. 삼척시는 우산국 정복 1500년을 맞는 올해 이사부 선양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울릉군과 삼척시는 2009년 자매결연을 맺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1500년의 세월이 지난 뒤 자매결연을 맺은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울릉도 주민들은 우산국의 후예가 아니다. 조선 태종 때부터 울릉도 주민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이는 쇄환(刷還)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왜구의 약탈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또 육지 주민들이 군역(軍役)을 피해 울릉도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고종 때까지 유지됐다. 지금 울릉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1882년 재개척 정책에 따라 이주해 간 육지 주민들의 후손이다. 따라서 울릉도 주민들이 우산국 1500주년을 맞는 감회는 미묘하다. 울릉군청의 한 관계자는 “우산국의 입장에서 보면 올해는 망국 1500년이 되는 해인데, 울릉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념사업을 펼칠 상황은 아니다”면서 “그러나 이사부의 정벌이 독도 영유권 문제 등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삼척시가 주도하는 기념 행사에 협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울릉도·삼척=안성규·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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