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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출신 김규식은 영어 한글학자 김두봉은 국어 가르쳐

중앙선데이 2012.02.26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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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학교 교사와 졸업생

미국 프린스턴대 영문학 석사가 어린 학생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저명한 한글학자는 한문과 국어를 가르친다. 이들 밑에서 배운 학생들도 훗날 크게 자랐다. 대를 이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3남매도, 우리나라 초대 오페라에 출연한 성악가도, 천재 신학자로 불린 대학교수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요즘 잘나간다는 특목고가 무색할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을 배출한 이 학교는 바로 인성학교다. 상해임시정부가 직접 관장한 이 학교는 독립운동과 전인(全人)교육, 글로벌 인재 양성의 요람이었다. 교장과 대부분의 교원은 임시정부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들로 이뤄졌다. 프린스턴대 출신 김규식, 한글학자 김두봉에다 안창호·여운형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교단에 섰다. 3∼5년마다 교사(校舍)를 옮길 만큼 시설과 재원은 열악했지만 민족의 앞날을 준비하는 열정은 뜨거웠다.

교장을 역임했던 인사들은 학교 운영을 주도했다. 고(故) 손정도 목사는 인성학교의 전신인 상해한인기독교소학의 설립에 기여했고 1919년엔 교장을 맡았다. 그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의 아버지이자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이 자서전『세기와 더불어』에서 ‘생명의 은인’이라고 묘사한 독립운동가였다. 여운형은 재정난으로 위기에 몰릴 때마다 학교를 구해냈다. 독립운동가 김태연은 3년간 밤낮 없이 학교 운영에 헌신하다 1921년 10월 과로로 별세했다. 김두봉은 한글·역사에 조예가 깊어 일제 통치를 받던 본국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국어·역사 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노력 덕에 넉넉지 않은 형편의 인성학교는 약 19년간 유지될 수 있었다.

4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가르친 학교인 만큼 졸업생들의 면면도 특별했다. 그 당시 유복한 편이던 전차 검표원(인스펙터), 상점 주인 등을 부모로 둔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가난에 시달리던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었다. 김구가 큰아들 김인의 손을 잡고 아침에 직접 학교에 데려다주고, 낮에는 동포 집에 데려가 점심밥을 먹이는 게 일상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졸업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나갔다. 부모처럼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어간 사람도 많았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붕준의 자제인 덕목·효숙·정숙 남매가 그랬다. 모두 건국 후 훈장을 받았다. 임시정부 외무부장을 지낸 조소앙의 딸 조계림도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박은식의 며느리가 된 최윤신과 안중근의 며느리가 된 정옥녀처럼 독립운동가 집안 사이의 결혼도 흔했다.

예술계와 학계, 교육계로 진출한 인물도 다수였다. 옥인찬은 뛰어난 성악가로 성장해 우리나라 초대 오페라 ‘춘희’에서 제르몽 역을 맡았다. 독립운동가 한진교의 아들 한태동은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가 돼 사상의 소통과 음성학 연구에 한 획을 그었다.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병조의 아들 송성찬은 영락중ㆍ고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진로가 불분명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한 졸업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 됐다.

매년 3월 1일은 인성학교를 보여주는 장(場)이었다. 1924년 3월 1일 인성학교 학생들은 교민 거주지를 중심으로 만세 행렬과 교내 기념식을 하고, 독립군을 주제로 한 연극을 펼쳐 상하이 동포들의 감회를 새롭게 했다. 3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안중근씨의 아우 안정근씨의 집에서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야 노인과 어린 아해까지라도 모두 자지 아니하고 있다가 마중을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고 묘사했다. 인성학교는 상하이 한인사회에 학교를 넘어선 ‘민족’ 그 자체였다. 한국혼을 배양하던 인성학교는 1935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소학교 90여 명, 유치원 150여 명 등 2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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