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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BEST] 4060 다시 세상으로 ⑤ 결혼 13년 만에 재취업, 건설회사 CEO 된 손성연씨

중앙일보 2012.02.23 03:20 주말섹션 4면 지면보기
CNC종합건설 손성연 대표는 여성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사업에 십분 활용한다. “상대방에게 내가 먼저 어떤 걸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상대방도 그 마음을 안다”는 게 그의 공사 수주 비법이다.
CNC 종합건설 손성연(52) 대표. 그의 이력은 남성들의 영역에 첫 진출한 ‘1호 여성’의 분투기로 요약된다. 1호 여성 토목기사였던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월급도 적게 주고 승진도 못하게 막는 첫 직장을 3개월 만에 그만뒀다. 또 임산부에게 쏟아지는 험한 현장의 시선에 밀려 두 번째 회사에서도 사표를 낸다. 그리고 13년. 그는 1남1녀 두 아이를 키우면서 재취업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았다. 서른일곱에 건설 현장으로 돌아와 마흔에 ‘내 사업’을 시작했고, 연매출 440억원의 탄탄한 회사를 일구어냈다. 여성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을 뒤집은 그의 놀라운 힘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그를 만나 들어봤다.


‘여성 토목기사 1호’ 자부심…차곡차곡 인맥 쌓아 마흔에 내 사업

글=문은영 객원기자 bweym2@naver.com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토목공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는. “나는 지리 과목을 좋아했던 문과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재단인 명지대에서 1년에 다섯 명씩 여성 인재를 키워보자며 학생들을 스카우트했다. 4년 장학금은 물론 취업까지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토목공학과 교수님들이 ‘설계는 여성이 더 섬세하게 잘할 수 있는 유망한 분야’라면서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당시 ‘토목공학과 젊은 교수 3인방’이었던 임성빈·편종근·박용원 교수님은 지금도 나의 멘토가 돼 주신다.”



 -1981년 대한민국 여성 1호로 토목기사 자격증을 땄다. 홍일점 여학생으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구조나 측량 등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가 힘들었고 내성적인 성격도 문제였다. 3학년 2학기가 되니 이 성적으론 취업도 어려울 것 같았다. 뒤늦게 공부하려 했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절박했다. 동기들이 스터디하는 신촌 여관방에 칫솔 하나만 들고 들어갔다. 동기들이 나를 귀찮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어라 공부했다. 4학년 8월, 토목기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회사는 학교와 비교할 수 없이 냉정한 곳이다. 여성이라 겪은 불이익은 없었나. “81년 12월 졸업 전에 취업이 됐다. 당시 토목 분야 최고의 회사였다. 몇몇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추천서도 받지 않았다. 임성빈 교수님이 자신의 브리사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회사로 찾아가 테스트만 받게 해달라고 청하셨다. 영어와 전공 테스트에서 만점을 받았다. 입사가 결정되니 ‘괴물 같은 여자가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입사할 때는 남녀차별이 있다는 걸 몰랐다. 똑같이 일하는데 첫 월급을 타고 보니 동기들보다 3만원이 적었다. 동기들은 4급에서 시작하는데 나만 6급이었다. 승진이 안 된다는 점은 더 큰 문제였다. 현장 배치도 해주지 않았다. 시정해 달라고 계속 요구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결국 첫 회사를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남광토건으로 옮겼다. ”



 -결혼도 일찍 한 편이다. “사촌언니 중매로 잡지 기자인 남편을 만나 83년 결혼했다.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만 보다 기자인 남편을 만나니 세련되고 부드러운 면에 호감이 갔다. 언론과 토목은 많이 다른 분야여서 서로 신기하게 생각했고 하는 일도 신선하게 봤다. 각자 하는 일에 대해 인정한다는 점,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입사 2년차, 한창 일에 재미를 붙일 시기에 직장을 그만뒀다.



 “결혼하고 바로 첫아이를 임신했다. 지하철이며 교량 건설 현장에서 발 하나 잘못 헛디디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현장 기술자들은 사고를 늘 두려워한다. 안전기원제까지 지내는 터에 여자, 게다가 임신한 여자라면 질색을 했다. 혹시 내가 현장을 다녀간 후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할 판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 현장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일에 대한 미련이 많았을 것 같다. “처음엔 아이를 낳고 바로 일을 하려고 출산 2개월 후 면접을 봤다. 회사에선 좋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와 자는 아이 얼굴을 보니 도저히 떼어놓고 일을 할 수 없었다. 면접을 다녀오는 사이, 젖이 옷에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 아이들을 키워놓고 일을 하자 결심하고 큰아이를 84년 1월에 낳은 뒤 둘째를 86년에 낳았다. 두 아이 키우는 동안은 친구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육아에 전념했다.”



 -전업주부로 지내는 동안 재취업을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도태되고 잊혀지는 게 두려웠다. 일에 대한 갈증으로 애들 자는 시간에 전공 서적을 들쳐보곤 했다.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업계 사람들도 간간이 만났다. 둘째가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건설 현장조사 등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96년 청란건설에 재취업했다.”



 -13년 만에 다시 사회로 나오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현장 경험이 적은 데다 일을 오래 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현장을 찾아가서 공부했다. 집에 가면 엉망인 아이들 돌보느라 정신 없었다. 이러다 일과 아이들 둘 다 놓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너무 컸다. 첫 1년 동안 평생 쏟을 눈물을 거의 다 쏟았지만 다시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대학 때보다 더 열심히 악착같이 살았다. 나를 너무 혹사하다 보니 몸이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보름 정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 온 직원들의 눈빛을 보면서 ‘내가 이 회사에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2007년 6월 20일 서울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열린 건설의 날 기념식에서 손 대표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왼쪽에서 첫째) 등과 함께 ‘비전 선포’ 버튼을 누르는 장면.
 -힘들게 회사에서 자리 잡고도 창업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 40세면 내 일을 시작하자는 게 인생 계획이었다. 직장은 남녀차별이 많으니 결국엔 내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인맥도 꾸준히 쌓으며 준비했다.”



 -창업 후 공사를 수주하기 어렵지 않았나. “창업을 준비할 무렵 경기도 양주에 포승공단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첫 계약을 따냈다. 2000년 4월 23일 오전에 계약서 도장 찍고 오후에 사무실 개소식을 했으니 행복한 출발이었다. 건설은 제조업과 다르다. 오로지 실적을 바탕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니, 실적 없는 회사는 수주를 하기 어렵다. 직접 현장을 다니며 신뢰를 쌓았고, 특히 하자보수에 신경을 많이 쓰면서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다.”



 -개성공단 건설 사업도 남보다 한발 빠르게 진출했다. “우리나라 건설산업은 정착기에 접어들어 물량 대비 업체 수가 많다. 고민 끝에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한 것이 개성공단이었다. 물론 처음엔 겁도 났다. 부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 넓은 허허벌판을 걸어다니며 그야말로 발로 개척한 곳이다. 힘들었지만 나의 진정성을 받아주는 회사가 하나 둘 늘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던가, 회사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경영 철학이 궁금하다. “정직한 거래, 신의, 접대 없는 사업 수주 등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해 계약을 따내는 것은 바른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 눈빛·마음·행동을 통해 내 자신의 진정성을 전달해야 한다. 건설업에선 접대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 회사에 일을 맡기면 잘되겠다’는 신뢰를 주는 것이 우선이다.”



 -어려운 고비가 닥칠 때 집중력과 에너지를 어디서 얻는가. “매일 새벽 기도를 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명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가장 맑은 정신으로 가족과 일을 생각한다. 그러면 인간 손성연이 감당해야 할 엄마·아내·딸·며느리로서의 역할이 보이고, 그 다음엔 회사 대표로서의 소임이 보인다.”



 -일에서의 성취와 더불어 가정을 잘 이끄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일하는 엄마로서 자녀들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부분은.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반드시 지키기로 한 원칙이 있다. 퇴근 이후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밤시간마저 일에 뺏기는 게 아이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일이 아니면 저녁 약속은 되도록 잡지 않았다. 또 퇴근할 때 지하철을 이용했다. 차로는 1시간 걸리는 거리를 지하철로는 30분이면 갈 수 있어 남는 30분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다 큰 지금도 내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이 접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롤모델이기 때문이다.”





4060 다시 세상으로 육아와 내조, 그리고 살림에 ‘올인’하며 살아온 주부들. 마흔이 넘어서면서 삶의 고민이 커진다. 남편도, 자식도 옆에 있지만 내 존재를 대신 증명해 주진 않는다. 그렇다고 쇼핑으로, 모임으로 시간을 보내버리기엔 삶이 너무 길다. 그 고민에 대한 답을 늦깎이로 일을 찾아 ‘성공한 프로’로 자리잡은 여성들에게 들어본다. 새로운 길을 열망하는 ‘4060’에게 롤 모델이 될 여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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