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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종의 미술 투자] 인쇄물 전시하는 박수근 미술관… 작품 아니라 절망을 봤다

중앙일보 2012.02.23 03:20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강원도 양구는 박수근의 고향이다. 루체른 강을 끼고 융프라우로 가는 길이 아름답다지만 소양강을 끼고 험한 산길을 넘어 ‘육지의 섬’ 양구로 가는 길에 비하면 어림없다. 이 겨울, 그 길엔 고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길가의 겨울 나목들이 박수근 작품의 예고편을 암시하는 듯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정림리 박수근미술관. 주변과 잘 어우러진 소박하지만 세련된 미술관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개의 관(官) 주도 미술관은 전문가들의 의견이 묵살되기 일쑤여서 조악하기 쉬운데, 박수근미술관은 기대 이상이었다.



 전시장에 전시된 박수근의 ‘굴비’라는 작품에 가슴이 뭉클했다. 1호 크기의 작은 캔버스에 조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임금에게 보내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굴·屈) 않겠다(비·非)’는 의미를 담았다는 굴비. 아래로 포물선을 그린 굳게 다문 주둥이, 부릅뜬 눈깔. 서로 포개어져 한 방향으로 놓여 있는 생선은 문자 그대로 ‘굴비(屈非)’다. 한 놈은 이자겸이고, 한 놈은 박수근이다. 조기 그림이 아니라 박수근 자화상이다. 힘든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 낸 동시대의 사람들과 자신의 모습이다. 소박하지만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인내의 정신이다. 이것이 ‘시대정신’이다. 그곳에서 ‘굴비’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여행은 값졌다.



 여러 가지 좋은 점도 많아 미술관 건립을 위해 애쓰셨던 모든 분에게 이제라도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몇 가지 유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국민화가라 부르는 박수근에 대해 그 격에 맞는 대우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박수근은 우리나라 돌을 좋아했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박수근의 초상 조각은 아름답고 소박했지만 청동 대신 그를 대표했던 화강암으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작품 수의 부족이다. 세계 어느 미술관에서 인쇄물로 작품을 전시하는가. 손수건보다 작은 작품 서너 점과 오프셋(offset) 인쇄물로 대체한 몇몇 작품 앞에서 예술이 아니라 절망을 봤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관과 소담하고 세련된 미술관에 박수근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이것밖에 없다면, 이건 박수근에 대한 비례(非禮)다. 개관한 지 10년이 넘도록 이 지경이라니….



박수근의 ‘굴비’. 하드보드에 유채.
15.5×29㎝,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기증.
 개인이 소장한 박수근 작품은 차치하고라도 국립현대미술관 등 공공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박수근 작품은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으로 보내져야 한다. 마땅히 더 많은 자료와 더 많은 작품도 기증돼야 한다. 그래서 박수근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찾아와 박수근의 시대정신과 박수근의 예술적 상상력에 하루 종일 푹 절어 있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도 고흐와 견줄 수 있는 위대한 예술가가 있음을 자각하게 해야 한다.



 지금 한류 열풍이 대단하다. 예상컨대 한류의 마지막 승부는 문화예술에서 결전을 맞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박수근을 근현대작가 중 으뜸으로 내놓을 것인데, 이 궁색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요한 풍경을 간직한 아름다운 자연, 서울에서 2시간 이내의 근접성, 담백하지만 맛있는 음식 등 양구는 좋은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다.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고흐나 뭉크를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이나 오슬로를 끊임없이 찾듯 문화도시 양구를 찾을 것이다. 양구는 긴장된 군사도시에서 아름다운 문화도시가 덧대어진 세계적으로 흥미 있는 도시가 될 것이다. 미술관을 기점으로 도시 전체를 활성화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미술 투자다.



 오는 길에 근처의 음식점을 들렀다. 투박하지만 정 깊은 강원도 특유의 맛. 막국수·감자옹심이·민들레전. “어, 이거 박수근 작품에 나오는 그 색깔, 그 질감, 그 맛이네.” 막국수를 먹으며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다. 국민화가라고 하면서도 이런 대접을 하는 우리의 모습. 생전에 박수근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는데, 박수근은 저승에서도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눈물이 나는 것은 막국수에 뿌려진 겨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양구 만세.



서연종 하나은행 삼성역 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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