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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값 내놓아라" 봉암사 큰스님, 뺨 후려치며 소동

중앙일보 2012.02.20 01:48 종합 8면 지면보기
문경 봉암사는 거대한 화강암 봉우리인 해발 998m 희양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수행 도량에 걸맞은 ‘사격(寺格)’을 갖췄다는 평가다. 주지 원타 스님(왼쪽)과 원택 스님은 절 앞마당을 거닐며 스승 성철 스님의 흔적을 되짚었다. 두 사람 뒤로 금색전(金色殿), 그 뒤로 희양산 꼭대기가 보인다. [안성식 기자]


성철(性徹·1912∼93) 스님의 행장(行狀·한 사람의 평생을 요약한 글)에서 봉암사(鳳巖寺)를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이 열반에 든 지 20년이 돼가는데도 ‘그의 신화’가 아직 생생한 것은 ‘봉암사 결사(結社)’의 영향이 크다. 그만큼 봉암사에서 일어났던 불교개혁 운동이 현재 조계종단에 끼친 영향은 넓고 깊다.

한 해 딱 하루 열리는 산문 … 거기 선이 있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중>



 8일 오전 9시 서울을 출발했다. 성철 스님의 상좌(上佐·제자)인 원택(圓澤) 스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해발 998m 높이의 희양산(曦陽山) 자락에 자리 잡은 봉암사에 이르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를 빠져나가 지방도를 여러 차례 갈아타며 20㎞ 길을 더 달려야 했다. 길 양편의 산세가 험해진다는 느낌이 들 무렵 원택 스님이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지세가 험해 큰 도적 아니면 도인이 나온다고 했던 곳입니다.”



 “1947년 성철 스님이 결사의 근거지로 봉암사를 선택한 것도 당시 대부분의 절이 대처승 차지였지만 이곳 봉암사만은 워낙 오지여서 무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봉암사 결사는 그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3년을 채우지 못하고 50년 봄 깨지고 만다. 한국전쟁 발발 전인데도 빨치산이 들끓어 스님들이 차분하게 수행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신변의 위협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30분. 차량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절은 숲에 가려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데 차량 통행 차단기를 갖춘 경비실이 길을 가로막는다. 사나워 보이는 몇 마리 경비견이 귀를 쫑긋 세운다.



 봉암사는 조계종의 몇 안 되는 폐쇄(閉鎖) 산문(山門) 중 하나다. 부처님 오신 날을 빼고는 1년 내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최고의 참선 수행 환경을 위해서다. 82년 종립 특별선원(禪院)으로 지정되면서 절 문을 닫았다.



성철 스님(오른쪽)은 열 살 많은 청담 스님과 친구처럼 지냈다.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동지이기도 했다. 청담의 딸 묘엄 스님을 출가시킨 이도 성철이다. 성철 스님은 번잡한 서울 나들이를 극히 꺼렸다. 1965년 북한산 비봉 부근에서 함께한 성철·청담 스님. [중앙포토]
 경비실을 통과하자 곧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뒤로 세속과 선경(仙境)을 가른다는 석문(石門)이 버티고 있다. 높이 4∼5m 돼 보이는 자연 석벽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길 양편 석벽을 석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희양산·구왕봉(887m) 등 ‘은산철벽(銀山鐵壁)’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절은 한눈에도 아늑하다.



 사찰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 해제 뒤끝이기 때문이다. 몇 남지 않은 선승들은 그나마 인근 산자락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포행(布行·천천히 걸으며 참선하는 것) 나갔다고 한다.



 소박한 점심 공양을 마치자 주지인 원타(圓陀) 스님이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스님은 “봉암사는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건립됐다”고 소개했다. 뿌리 깊은 선찰(禪刹)이다. 국보 315호인 지증대사적조탑비, 보물 169호인 삼층석탑 등 문화재가 즐비하다. 성철은 오래된 석탑 주변을 거닐며 ‘진리의 길’을 찾고 또 찾았을 것이다. 대웅보전 옆에 스님이 사용했다는 자그마한 극락전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봉암사 결사는 제도 개혁이 아닌 참선 수행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부처님 법이나 조사(祖師·한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스님 법에 틀렸으면 지적해서 고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하고 실천하자. 곧 내일모레 굶어 죽는 한이 있다 해도 (부처님) 법대로, 법 가깝게 우리 한번 살아보자”는 원(願)을 세웠다(성철 스님의 84년 월간 ‘해인’ 기고문 중에서).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참선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밥 해주는 공양주, 땔나무 마련하는 부목(負木) 처사부터 내보냈다. 그리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이라는 불교 전통의 청규(淸規) 정신에 따라 손수 먹거리를 구했다.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 앞에서 스스로 죄를 자백하는 포살(布薩), 현재의 괴색(壞色·검붉은 자목련색) 승복,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예법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성철 스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스님들의 분심(憤心)을 자극해 오로지 참선에만 매진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종정(宗正)인 법전(法傳) 스님의 회상기(『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를 보면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가 생생하다. 글에 따르면 성철 스님은 동료·제자 스님들의 참선 집중도가 떨어진다 싶으면 “밥값 내놓아라!”라고 쩌렁쩌렁 고함 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뺨을 후려치는 건 기본, 한겨울에 물벼락을 맞거나 성철 스님이 던진 놋쇠 향로를 머리에 뒤집어 쓴 스님도 있다. 훗날 해인사를 호령했던 ‘가야산 호랑이’라는 괄괄한 성정이 이때 벌써 싹을 보인 것이다.



 그런 다그침 때문이었을까. 결사에 참가했던 20여 명의 스님 중에서 조계종 종정이 네 명(성철·청담·혜암·법전), 총무원장이 여섯 명(청담·월산·자운·성수·지관·법전)이나 나왔다. 일제강점기 사그라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이 기운차게 되살아난 셈이다.



 현재 봉암사 태고선원(太古禪院)은 전국의 선방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안거철이면 80∼100명의 선승이 함께 수행 정진한다. 주지 스님도 형식적으로 추천받을 뿐 자체적으로 뽑는다. 그만큼 자율성이 인정된다. 원타 스님은 “60여 년 전 결사의 전통이 살아 있는 수행의 중심 도량이라는 자부심이 선승들 사이에 강하다”고 했다.



 선승들은 지난 동안거 기간에도 산골짜기 봉암사에서 뭇 중생들을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를 밤낮 올렸을 것이다. 절 문을 나서는 순간, 성철 스님의 호탕한 일갈이 들리는 듯했다.



 “좋으나 궂으나, 자기이익을 완전히 떠나서 바로 믿고 살자 이것입니다. 좀 손해를 본다 싶어도 그것이 바른 길이면, 아무 의심 없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바른 길로 걸어가 봅시다.”(월간 ‘해인’ 기고문)





조계종 자체 개혁 운동 … 종정 4명 총무원장 6명 배출



◆봉암사 결사=1947년 10월부터 50년 3월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경북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鳳巖寺)에서 행해진 조계종 승려들의 불교개혁 운동이다. 결사(結社)는 불교계 정화와 혁신을 위한 운동을 뜻한다. 처음에는 성철(性徹) 스님을 비롯, 청담(靑潭)·자운(慈雲)·우봉(愚峰) 스님 등 네 명이 시작했으나 향곡(香谷)·월산(月山)·종수(宗秀)·도우(道雨)·성수(性壽) 스님과 현 조계종 종정(宗正)인 법전(法傳) 스님, 묘엄(妙嚴) 등 비구니 스님까지 가세해 식구가 20여 명까지 늘었다. 결사의 목표는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었다. 일제의 영향, 토착 기복신앙 등으로 혼탁해진 불교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곧게 참선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땅에 떨어진 승풍(僧風)을 회복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결사 참가 스님 중 조계종 종정이 네 명, 총무원장이 여섯 명 나왔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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