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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대학’서 사학 명문 일군 열정 61년

중앙일보 2012.02.20 01:13 종합 22면 지면보기
1972년 조영식 박사가 경희대 전체 학생 앞에서 ‘민주시민 특강’을 하고 있다. 조 박사는 “대학은 정신적 심연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건져내고, 정신과 물질의 불균형에서 오는 현상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박사는 18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고 조영식 박사
경희대 설립자 조영식(趙永植) 박사가 18일 숙환으로 경희의료원에서 타계했다. 91세. 경희대, 경희중·고교, 경희의료원 등 12개 기관 3만5000명의 학생과 직원이 몸담고 있는 경희학원을 세우고 61년간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조영식 경희대 설립자 타계
30~91세 대학에 일생 헌신
군사정권 땐 총장 두 번 내놔



 ‘오~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가곡 ‘목련화’의 작사가로도 유명한 조 박사는 1921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다. 광산을 경영하는 부친 밑에서 자랐다. 44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돼 평양의 공병부대에 배치됐다. 탈출을 결심하고 조선인 학도병을 규합했다. 계획이 탄로 나 1개월 간 고문을 받고 석 달간 수감 생활을 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동지들과 토론식 학습을 했다. 조 박사는 이후 “다양한 생각들이 충돌해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을 감옥에서 경험했다”고 말했다 한다.



 조 박사는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하루 10시간 책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이런 노력 덕에 고인은 『민주주의 자유론』 등 51권의 책을 썼다. 고인이 대학 운영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서른이던 51년부터다. 현재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초급대학(2년제)을 인수하면서다. 피란 정부의 부통령이던 이시영 선생의 부탁 때문이었다. 건물도 땅도 없는 ‘천막대학’이었다. 남은 것은 은행 빚과 밀린 월급뿐이었다. 조 박사는 사재를 들여 건물을 지었으나 2년 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조 박사는 포기하지 않고 건물을 새로 지었다.



 53년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지금의 경희대 터(서울 동대문구 회기동)를 확보했다. 55년에 4년제 종합대학 인가를 받고 조 박사는 직접 마스터플랜을 짰다. 같은 해 부산에서 서울로 학교를 옮겨 ‘회기동 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60년에는 대학을 현재 이름으로 바꿨다. 조선 영·정조 시대의 정궁인 경희궁에서 따왔다.



 정치와 거리를 둔 교육자의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군사정부 시절 정치적 외압 때문에 총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는 수모를 두 번 겪었다. 5·16 직후 ‘5월 동지회’ 회장 제의를 거절한 게 미움을 샀다. 군사정부는 명망가인 조 박사를 영입해 정통성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조 박사는 문교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총장 승인을 취소 당해 2년 뒤 총장직에 복귀했다. 1980년 신군부는 사회 혼란의 책임을 대학에 덮어씌우며 조 박사 등 몇몇 사립대 총장을 강제 사퇴시켰다. 조 박사는 8년 뒤인 88년 다시 총장직에 복귀했다가 93년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국제통인 그는 65년 세계대학총장회(IAUP) 창립을 주도했다. 68년에는 IAUP 서울대회를 유치했다. 그는 공적 책임에도 관심이 많았다. 65년에 『우리도 잘살 수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에게 “당신 책을 세 번 읽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유엔 ‘세계평화의 날 지정’(82년), ‘서울NGO세계대회’(99년) 등을 주도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아인슈타인 평화상, 비폭력을 위한 마하트마 간디상, 대한민국 정부 국민훈장 무궁화장, 만해평화상 등 67개 상훈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 조인원 경희대 총장 등 2남, 조여원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 교수, 조미연 경희학원 이사 등 2녀가 있다. 독고윤 아주대 경영학부 교수, 구자명 LS니꼬동제련 대표이사 회장이 고인의 사위다.



 빈소 및 분향소는 경희대 서울캠퍼스 평화의 전당, 국제캠퍼스 중앙도서관, 광릉캠퍼스 대회의실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경희학원학원장으로 23일 오전 9시 치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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