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입술 두툼하고 눈 째진 비너스 … 다시 물어본 ‘아름다움의 기준’

중앙일보 2012.02.20 00:44 종합 31면 지면보기
데비한, 미의 언어Ⅶ-01(2010). 두툼한 입술, 째진 눈 등 각 인종의 특성을 반영한 녹슨 청동 비너스 두상 시리즈 중 하나다. [성곡미술관]
한 젊은 여성이 미대 입시학원이 즐비한 서울 홍익대 앞에서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학원 창문마다 마치 한 사람의 것처럼 똑같은 석고 데생이 가득 붙어 있는 장면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성곡미술관서 개인전 여는 데비한

 대체 이곳에서는 어떤 미술 교육이 행해지고 있기에…. 2004년 1월의 일이다. 재미동포 미술가 데비한(43·한은진)은 이 무렵 아예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너스, 즉 미의 기준이라는 주제를 파고 들었다.



 한씨는 회화를 전공했지만 사진·조각·설치·전통공예 등 변화무쌍한 작품 세계를 펼쳐왔다. 그의 개인전 ‘존재(BEING): 데비한 1985∼2011’이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985년부터 현재까지 시기별 대표작 60여 점을 엄선한 중간 회고전이다.



 한씨는 미국 UCLA 재학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다. 당시 그를 사로잡았던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캔버스에 검은 추상화로 나타난다.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에 와선 건물 밖으로 던져진 쓰고 버린 콘돔을 확대한 조형물을 만들었고, 굴러다니는 개똥을 주워다가 고급 초콜릿 모양을 만들었다.



 한국에 와서는 미술학원에 널려 있는 지우갯밥을 모아 도화지에 하나하나 붙여 아그리파·아리아스 등 입시미술의 석고상 부조를 만들었다. 경기도 이천 도자가마를 오가며 청자·백자를 배워 비너스 두상을 만들었고, 이 두상에 다양한 인종의 특성을 반영했다. 입술이 두툼하거나 눈이 째져 있는 이들 비너스는 고착화된 미의 기준에 던지는 물음표다. 서구미의 상징인 비너스의 머리에 평범한 한국 여성의 몸을 합성한 사진으로 소버린 아시아 미술상(2009)도 수상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데비한은 “다들 서구를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내 추구가 고리타분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기에 추구할 수 있었다”며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세상은 무엇인가 등 존재에 대한 탐구가 지속되는 한 나는 그걸 계속 작업으로 풀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성곡미술관 박천남 학예연구실장은 “데비한의 작업엔 우리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다. 같지 않다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차이와 다름을 인정한 그의 작업은 세상에 대핸 관성적인 학습과 인식을 재치 있게 뒤집는다”고 평했다. 전시는 3월 18일까지. 성인 3000원. 02-737-7650.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