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에게는 문학이 위암 투병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중앙선데이 2012.02.18 23:55 258호 33면 지면보기
소설가 박영한. [사진 중앙포토]
박영한의 중편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이 계간문예지 ‘문예중앙’에 발표된 것은 1983년 내가 그 잡지의 데스크를 맡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박영한은 사무실에 비교적 자주 들렀다. 특히 나와 함께 편집기자로 일하던 시인 이달희, 소설가 심만수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만날 때마다 술자리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사를 하게 되면 예외 없이 집들이에 초대받을 정도였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6> 고뇌의 소설가 박영한

그때 박영한은 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집들이에 초대받은 것만 서너 차례였다. 아내와 두 어린 자식을 거느리고 이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만했으나 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그 까닭은 알 수가 없었다. ‘지상의 방 한 칸’은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글을 쓸 수 있는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이는 작가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박영한이 살아온 삶을 되짚어 보면 조촐하고 아늑한 방 한 칸을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차라리 행복해 보였다. 1947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박영한은 ‘복잡한 집안 사정’으로 가정이 풍비박산한 데다 일곱 식구의 생계를 이끌어 오던 어머니마저 와병하면서 나락의 삶을 살아야 했다. 부산 변두리의 사글셋방을 전전하는 가운데 작은형은 가출했고, 큰형은 간질병으로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어린 두 동생은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어야 했고, 박영한은 고학으로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그 꿈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작정 가출이었다. 스무 살 때였다.

그렇게 시작된 부랑 생활은 3년 동안 이어졌다. 동가식서가숙으로 공장 직공, 부두 노동자에 심지어 해변에서 거리의 악사 노릇까지 하면서도 국내외 소설가시인들의 글을 마구잡이로 독파했다. 밑바닥 삶을 전전한 그때의 체험들은 81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노천에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영한은 종종 “그때의 방랑생활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마음을 추스르고 연세대 국문과에 입학한 것은 70년 스물세 살 때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학업에 열중하거나 습작에 매달리기엔 너무 지쳐 있었고, 장래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곧바로 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입대해 월남 파병을 자원한다. 아직도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고독감과 절망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는 백마부대 29연대의 보도병으로 25개월 복무했다.

제대 후 복학한 박영한은 졸업할 무렵에는 나이가 서른에 이르고 있었다. 졸업 전 그는 동래 범어사의 조그마한 암자인 ‘사자암’으로 들어가 소설을 썼다. 월남전 체험을 배경으로 한 ‘머나먼 쏭바강’이다. 그때 만들어진 초고는 200장 분량이었는데 이를 700장의 중편소설로 개작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이 중편소설이 77년 ‘세계의 문학’에 발표됐고, 이를 다시 1700장짜리 장편으로 개작해 78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주위가 산만하고 번잡스러우면 단 한 줄의 소설도 쓰지 못하는 습성은 이때부터 생겼던 듯싶다.

박영한의 작가생활은 근 30년이나 되지만 그 기간 중 그가 남긴 작품은 ‘머나먼 쏭바강’과 속편 격인 ‘인간의 새벽’ 등 장편소설 너덧 편과 연작소설 ‘왕룽일가’와 중편소설 너덧 편 등 모두 합쳐 열 편 남짓이다. ‘머나먼 쏭바강’이 10만 부를 돌파했고, ‘왕룽일가’ 등 몇 편이 TV 드라마로 만들어져 경제적으로 다소 도움이 됐다고는 해도 그 정도의 수입만으로 생계를 꾸려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사실 글쓰기에 알맞은 ‘방’을 찾아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고는 하지만 경제 형편에 맞는 집을 찾다 보니 도심에서는 멀리 떨어진 김포, 안산, 능곡, 고촌 등 변두리로 이사를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게 분명하다.

70~80년대의 전업작가 여럿을 눈여겨봤지만 박영한만큼 고통스럽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이 생전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한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탈출구는 술이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셨고, 그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에게 ‘글쓰기의 괴로움’과 술은 악순환이었다. 그가 직장다운 직장을 가진 것은 대학을 졸업한 76년 제약회사 광고부의 카피라이터로 일한 1년이 고작이었다.

2000년 부산 동의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됐을 때 주위에서는 박영한이 고통스러운 소설 쓰기와 술로부터 해방돼 안락한 새 삶을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2002년에도 강원도 오지 체험을 담은 마지막 작품 ‘카르마’를 내놓았고, 여전히 술을 마셨다. 위암이 발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수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는 듯했지만 3년 후 위암이 재발해 2006년 8월 59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투병 중 가족과 친지들에게 “그래도 문학이 암 투병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