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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 조계사 근처 다방 가니 여종업원도 "물은…"

중앙일보 2012.02.15 01:52 종합 8면 지면보기
성철 스님 열반 후 백련암 내에 들어선 법당인 고심원(古心院) 안에 모셔진 스님의 좌상. 고즈넉한 산사에서 스님은 대자유, 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고 또 찾았다. [안성식 기자]


25세 이영주가 머리 깎고 불교와 만난 곳, 해인사 퇴설당 들어서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걷거나 머물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 스님의 죽비가 잔설이 되어 내리치고 있었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상>
조계사 인근 다방 레지도 엽차 내놓으며 읊조렸다
산은 산, 물은 물이지요

다음 달 11일은 퇴옹(退翁) 성철(性徹·1912∼93) 스님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스님은 20세 한국 불교의 아이콘이었다. 치열한 수행, 소탈한 생활로 불교계는 물론 뭇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큰 어른이었다. 스님의 탄생 100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도 잇따를 예정이다. 성철 스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던지고 있을까. 그 뜻을 가늠하기 위해 스님의 주요 행적지 세 곳을 찾아간다.



지난 8일 오전 8시50분.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했다. 젊은 스님 일덕(日德)이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일주문 양쪽 기둥의 주련(柱聯·기둥에 세로로 써 내린 글귀)이 눈길을 붙든다.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 영원히 변치 않을 불법, 끝내 사람들에게 기억될 성철의 구도 정신을 상징하는 듯했다.



 9시30분 해인사 방장 시절 스님의 거처였던 퇴설당(堆雪堂)에 들었다. ‘사시좌선(四時坐禪)’. 오래된 편액(扁額)이 마당으로 통하는 문 위에 걸려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 걷거나 머무르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고 했던 스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살아서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존경받았고, 죽어서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큰스님 반열에 오른 성철(속명 이영주) 스님. 갈수록 승려가 왜소해지고 산중의 청정 도량마저 혼탁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요즘, 생전 스님이 보여줬던 품은 여전히 넉넉하고 깊다. 종교·승속(僧俗)을 떠나 수행생활의 귀감이 됐던 스님의 치열했던 정진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진진하다.





 대표적인 게 8년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이다.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자며 참선하고, 무려 10년 동안 절 문밖 발길을 끊고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는 ‘전설적인’ 얘기다. 스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한 계율(戒律)을 스스로에게 부과한 뒤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1993년 스님의 열반은 그 자신을 ‘살아 있는 부처’로 봉인하는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그해 11월 10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스님의 다비식에는 30만 명이 몰린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초반부터 스님을 모신 원택(圓澤) 스님은 “해인사 밖 30리부터 길이 막혔다”고 회고한다.



 해인사를 찾은 건 이 절과 부속 암자인 백련암이 스님의 출가 도량이자 열반 도량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25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정확히 57년 뒤 열반에 들었다. 해인사와 백련암은 자연인 이영주(李英柱)가 불교와 운명적으로 만난, 시작과 끝이다.



 퇴설당 마당에는 전날 내린 잔설이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눈 쌓인 집이다. 바로 옆에 법보종찰(法寶宗刹)이라는 해인사의 별칭이 유래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있다.



 스님은 “맑은 기운이 흘러나온다”며 판전 주변을 즐겨 걸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열반에 든 곳도 퇴설당이다. ‘일생 동안 사람들을 속인 죄 수미산을 지나친다’는 내용의 열반송도 여기서 공개됐다.



 스님은 81년 1월 해인사에서 조계종 7대 종정에 추대됐다. 당시 밝힌 종정 수락 법어(法語)는 그를 일약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법어는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라는 알쏭달쏭한 글귀로 시작해 회심의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로 끝난다.



 대중은 맹물 같은 ‘산은 산, 물은 물’에 열광했다. 당시 스님들이 서울 조계사 근처 다방을 찾으면 레지(여종업원)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에요”라며 보리차를 가져다 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스님과 인연을 맺은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퇴설당을 뒤로하고 백련암으로 향했다. 점심 무렵 암자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해인사에서 산길로 30분 거리였지만 지금은 암자 턱밑까지 포장이 돼 있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가 끝나자 스님들이 대부분 만행(萬行)을 떠나서다. 대신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기도를 하러 온 신자 몇몇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신자 가운데 서울에서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윤희진(38)씨가 있었다. 그는 일주일 휴가를 받아 백련암에서 매일 3000배를 올리고 있었다. “게으름 피우면 새벽 3시에 시작한 3000배가 오후 8시에 끝난다”고 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윤씨는 “나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는데 백련암에서 주변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윤씨는 인터넷 카페 ‘3000배’의 회원이다. 성철 스님의 정신을 기리며 백련암을 찾아 기도하는 모임이다. 백련암 일덕 스님은 “‘3000배’ 같은 인터넷 모임이 3개 더 있다. 덕분에 주말마다 60∼80명의 신자가 북적거린다”고 했다.



 스님은 퇴옹이라는 법호(法號)에 걸맞게 평생 뒷전에 물러나 불교계의 시빗거리와 담을 쌓고 살았다. 간간이 세상을 향해 매서운 죽비를 내리쳤을 뿐이다. 이런 스님의 행적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우침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 평일 오후 백련암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들을 보며 빈부·이념에 따라 갈기갈기 갈라진 우리 사회를 꿰매는 실마리를 보는 듯했다.



 “우리는 본래의 평화의 꽃이 만발한 크나큰 낙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립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성철 스님의 법어 ‘중도(中道)가 부처님’에서)





내달 성철 스님 특별전 열려

수행 24곳 순례 프로그램도




성철 스님 의 수행 도량 24곳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조계종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과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이 함께 준비했다. 다음 달 31일 스님이 태어난 경남 산청군 생가 터 옆에 건립된 겁외사부터 2014년 8월 마지막 방문지인 해인사까지 매달 한 차례씩 순례할 예정이다. ‘100주년 다례제’ ‘성철 스님 특별전’ 등도 다음 달 열린다. 순례 문의 166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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