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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고 연극하는 주부 김해영씨의 ‘도전 10년’

중앙일보 2012.02.13 19:41
“죽을 때까지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김해영 씨가 연극 ‘의상실 판타지’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51살, 글쓰기에 눈 떴다…59살, 첫 무대에 섰다, 하고픈 일, 아직 많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여유라곤 단추 구멍만큼도 없었던 주부 김해영(60, 송파구 가락동)씨는 51세에 글쓰기에 도전했다. 매일 밥하고, 빨래하던 손으로 연필을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다.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한 편의 글이 되고…. 반세기 동안 참아왔던 삶의 열정은 글을 통해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왔다. 책 출판, 영화 출연, 대학 진학 그리고 시니어 연극배우가 되기까지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그를 만났다.



 “글쓰기 반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서 며칠 동안 열병을 앓았어요. 안 하면 못살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신청 했어요.”



 평범한 주부 김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부로 살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 시원히 못한 채 살아왔던 김씨의 가슴에는 늘 커다란 돌이 놓여있었다. 2002년 가을, 주부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는 웹매거진 줌마네(cafe.naver.com/zoomanett)의 ‘글쓰기반 모집’ 공고를 봤을 때 그 돌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쉽지 않았다. 3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 사이의, 김씨보다 젊고 학벌 좋은 15명의 여자들 사이에 앉아있으려니 남의 옷을 빌려 입는 듯 불편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괜한 짓을 벌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로 마음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50년을 기다려온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 시간 반을 버텼다.



 김씨는 이듬해 봄 졸업 작품 ‘덕유산 겨울연가’를 발표하고 줌마네 웹진 필진으로 데뷔했다. 2003년에는 함께 공부한 주부들과 『밥퍼! 안퍼!』(뿌리와이파리, 2003)란 책을 냈고, 어릴 적 경험담을 엮은 『엄마 아주 어렸을 적에』(진선, 2005)란 동화도 썼다. 인터넷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는 등 전문 기고가로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갔다. 김씨는 글쓰기가 ‘정거장’이라고 말한다. 글을 쓰다 보면 내면의 힘이 자라나고, 그 힘으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집안일 하던 손에 펜 쥐고, 대학 졸업장 따고



 김씨는 그 정거장에서 어떤 버스를 탔을까?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못 마친 학업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 길로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내친김에 2006년 대학의 문턱까지 넘었다. 싱싱한 스무살 학생들과의 경쟁도 아무 문제되지 않았다.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을 하니 즐거웠다. 김씨는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했고 2008년 당당히 대학 졸업장을 따냈다.

 

 김씨의 마음에 또 한 번 불을 댕긴 것은 연극이었다. 글을 배웠던 줌마네에서 갑자기 연극 연출을 맡게 됐다. 연극 관람 경험조차 변변히 없던 김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시나리오에 대해서 수없이 질타를 당하기도 하고, 배우 섭외에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마침내 성미산마을극장(cafe.naver.com/sungmisantheater) 개관 공연 ‘라디오 편지쇼 아줌마시대-내 나이 마흔에는’을 마칠 수 있었다.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소리와, 지인들의 감격스러운 눈빛에 김씨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연극은 글과는 또 다른 세계였어요. 함께 일하며 역할을 나누고 상대방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을 통해 인생에 큰재산이 될만한 것들을 배웠어요”



 연극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어진 김씨는 2010년 가톨릭영시니어아카데미에 들어갔다. 2년 후 김씨는 빨간 립스틱을 칠한 섹시한 마네킹의 모습으로 연극 ‘의상실 판타지’에 등장했다. 오는 4월 25일에는 ‘서울 쥐와 시골쥐(성미산마을극장)’에서 연극인 김해영씨를 만날 수 있다.



 한 줄의 글로 시작된 김씨의 특별했던 지난 10년의 여행은 이제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김씨는 “자신의 이름을 잊은 채 사는 주부들이 많다”며 “그들에게 내 경험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주부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게 그의 목표다. 김씨는 그 일을 위해 오늘도 한 줄의 글을 쓰며 내면의 힘을 키워가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싶으면 춤을 출 것이다. 우리는 시를 짓고 연극을 하고 또 드럼을 치고 마음이 내키면 언제든 여행을 떠날 것이다. 흙이 좋으면 흙 속에서 살 것이요, 바다가 부르면 달려갈 것이다. 또 놀고 싶을 때 마음껏 놀 것이다. 종심(從)을 선택하고 누릴 권리는 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 김해영의 ‘네 멋대로 해라(2005년 12월, 줌마네 웹진)’중에서



<강미숙 기자 suga337@joongang.co.kr/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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