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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존경 받는 대기업상을 만들자

중앙일보 2012.02.07 00:01 종합 34면 지면보기
주요 정당의 재벌정책이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얼마 전 민주통합당이 재벌개혁안을 발표한 데 이어 새누리당의 재벌개혁안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새누리당은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는 부활하지 않고, 대신 순환출자를 금지할 모양이다. 하지만 순환출자를 갑자기 금지할 경우 그룹이 해체되거나 외국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새누리당이 이미 형성된 순환출자는 인정하되, 대신 새로운 순환출자만 금지하기로 한 이유다.



 반면 민주당은 이보다 더 혁신적인 재벌정책을 지난달 이미 발표했다. 출총제 부활과 재벌세 도입뿐 아니라, 고의적인 일감 몰아주기에는 배임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또 대기업이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 진입할 경우 징역형이나 벌금형을 부과하기로 했다.



 새누리당이건 민주당이건 재벌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여론과 국민 정서에 따라 재벌정책은 향후에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양당의 재벌정책안을 비교해본다면, 출총제 부활을 공약한 민주당보다 순환출자를 규제하기로 한 새누리당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옳다. 출총제와 순환출자 규제는 가공(架空)자본을 억제하기 위한,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선 둘 다 같이 도입하자고 하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만일 둘 중 하나만 시행한다면 순환출자 규제가 옳다. 출총제는 기업의 신규 투자를 억제하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대기업들은 신규 사업을 시작할 때 대부분 계열사 간 출자를 통해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출자총액을 묶으면 투자가 사실상 억제되고, 이 때문에 역대 정부도 출총제를 지속적으로 완화해왔다. 재벌을 강하게 규제한 노무현 정부도 출총제는 실효성이 없으며, 거칠고 무식한 규제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다만 순환출자 규제를 도입한다고 해도 급격하게 시행해선 안 된다. 공정거래법에 순환출자 해소를 명시하되, 해소 기한은 어느 정도 줘야 한다. 그동안 순환출자를 해소하려 노력해온 그룹도 많지만, 아직도 일부 그룹은 당장 금지할 경우 충격이 대단히 클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책이건 현실을 무시해선 안 된다. 재벌정책 역시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하물며 재벌은 성장 엔진과 경쟁력 강화라는 순기능이 대단히 크다. 부작용을 없애는 데만 집착해 재벌 규제에만 얽매일 경우 순기능까지 말살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역대 정부의 재벌정책은 늘 이러했다. 정권 출범 때는 재벌개혁을 거창하게 내세웠다가 후반기로 갈수록 대부분 용두사미가 됐다. 현실을 무시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투자 및 일자리 창출이 저해됐고, 외국기업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양당은 처음부터 재벌정책을 정밀하게 수립해야 한다. 물론 그 방향은 순기능을 살리되 부작용은 최소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재벌을 타도나 말살의 대상으로 봐서도 안 된다. 재벌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모는 정치권의 행태도 크게 우려할 부분이다. 물론 우리 사회도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원인은 금융 세계화 탓이 더 크다. 재벌에도 일말의 책임은 있지만 주범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도 재벌을 주범으로 몰아가는 건 정치권의 정략적인 계산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재벌을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도 개선돼야 한다. 재벌정책은 선거용 대책이라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국가적 대사(大事)다. 평소에 재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 간 충분한 토론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 따라 평소에, 그러면서도 신중하고 정밀하게 추진돼야 한다. 지금처럼 선거철만 되면 재벌정책이 속성으로 만들어지는 행태가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



 재벌이 동네북 신세가 되고 있는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기도 하다. 양극화 심화와 공동체 와해에 재벌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일방적인 납품단가 인하와 거래관계 단절 등 불공정 거래의 피해를 본 중소기업은 상당수다. ‘재벌가 딸의 베이커리 전쟁’ 같은 것도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재벌은 ‘기업은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존재’라고 강변할 것이다. 이익이 되는 업종이면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어야 시장경제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재벌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다. 경제적·사회적 비중이 대단히 크다. 재벌의 사회적 책임을 요청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은 건 그래서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바라는 재벌의 모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큰 덩치로 국내에서 어린애들과 싸우면서 코흘리개들의 돈을 탐내선 안 된다. 해외에 나가 외국의 거대기업들과 맞짱을 떠 돈을 벌고 그걸 국내로 가져 들어오는 기업이기를 원한다. 이런 국민의 바람을 진작 알고 실천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재벌 때리기는 없었을 것이다. 정치권과 재벌 모두 한 발짝씩 물러나 ‘존경 받는 재벌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놓길 거듭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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