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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1주년 일본, 한국 설치미술가 이불에 왜 끌렸나

중앙일보 2012.02.06 01:31 종합 8면 지면보기
모리미술관에 새로 설치된 이불의 ‘몬스터’(1998) 시리즈. 앞의 것이 ‘몬스터:블랙’, 뒤의 것이 ‘몬스터:핑크’. 천을 이용해 여러 개의 촉수가 달린 기괴하고도 부드러운 형상을 만들었다. 신체의 한계에 대한 고민, 인간의 조건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모리미술관 제공]


“이 전시가 몇 년 전에 열렸다면 아주 달리 보였을 겁니다. 그때는 산다는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될 만큼 모든 게 다 잘 되던 때였으니까요.”(가타오카 마미 일본 모리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그 끔찍함이 ‘인간’에 대해 묻게 했다
도쿄 모리미술관서 회고전



 “일본 미술계 분들로부터 ‘이런 시점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무거운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한국 설치미술가 이불)



 동일본 대지진 발생 1년을 앞둔 일본이 ‘인간의 조건’에 대해 숙고하고 있다.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4일 개막한 설치미술가 이불(48)의 첫 회고전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FROM ME, BELONGS TO YOU ONLY)’가 그 화두가 되고 있다.



이불
 도쿄 번화가 롯폰기힐스에 위치한 모리미술관에서는 그간 일본의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 미국의 빌 비올라, 프랑스의 아네트 메사제, 중국의 아이웨이웨이(艾未未) 등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이불은 한국 미술가로는 처음, 일본 외 아시아 미술가로는 두 번째로 이곳에서 전관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는 ‘덧없는 존재’ ‘인간을 넘어서’ ‘유토피아와 이상의 풍경’ ‘나로부터, 오직 그대에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이불이 시기별로 천착해 온 주제들이다. 전시는 22년 전의 퍼포먼스 영상으로 시작된다. 이 시기 이불은 여전사였다. 1990년 그는 괴물같이 기괴한 풍선 옷을 입고 도쿄시내를 12일간 활보하며 퍼포먼스를 벌였다. 97년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구슬을 바느질한 날생선 ‘화엄’을 전시했다. 부패와 악취를 견디지 못한 미술관 측이 작품을 사흘 만에 철거하자 이에 맞서기도 했다. 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는 팔다리 한 짝씩만 갖춘 머리 없는 새하얀 형상들을 매달았다. 이 ‘사이보그’ 시리즈로 그는 특별상을 받았다. 전시는 작가가 20년 넘게 질문하고, 도발하고, 싸워 온 여정을 한눈에 보여 준다.



 이불은 동시에 철학자였다.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오만, 이상의 실패…. 그는 여기서 인간의 조건·운명을 봤다. 전시 후반엔 그가 2007년 파리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 개인전에 내놓았던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 작품들이 등장한다. 전 세계인이 언어장벽 없이 소통한다는 이상에서 고안된 에스페란토어 문장이 흘러가는 발광다이오드(LED) 탑, 한국근대사를 관통하는 인물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설치미술 작품 등이다. 도쿄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마지막 방에선 신작 ‘비밀 공유자’를 만날 수 있다. 15년간 서울 성북동 집에서 키우던 황구가 죽자 이를 모티브로 만든 크리스털과 거울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내려다보며 구슬을 토해 내는 개 조형물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모리미술관은 이번 회고전을 위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이불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퍼포먼스 등으로 사라진 일부는 새로 복원했다. 설치미술작품 40여 점, 드로잉 150여 점으로 회고전의 위용을 갖췄다. 이불의 서울 성북동 드로잉룸과 유사한 스튜디오를 재현, 이 작가가 어디서 영감을 얻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도 엿볼 수 있게 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일본의 미술평론가 고지마 야요이는 “어떤 관객은 이 전시를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끔찍한 것들을 숱하게 보지 않았나. 아마 많은 일본 관객이 이불의 작품을 아름답다 여길 거고, 그 이면에 담긴 인간의 조건에 대한 질문을 이해할 거다”고 말했다.



 이불은 “지난 20여 년 뒤돌아볼 새 없이 달려왔지만 전시를 계기로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20대에는 누구나 자기가 만들지 않은 세계와 부딪친다. 부조리하고, 받아들일 수 없고, 바꾸고 싶고, 그리고 당시엔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젠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저항이자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대지진 이후 달라진 일본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이불의 답이다. 전시는 5월 27일까지.



◆이불=1964년 강원도 영월 출생. 87년 홍익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내면의 분노와 에너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예술가로 출발한 뒤 토종 미술가로 세계 무대에 우뚝 섰다. 이불은 본명, ‘새벽 불(?)’ 자를 쓴다.



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이불
(李불)
[現] 설치미술가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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