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68년 김신조 침투조는 31명 아닌 33명, 2명 전향시켜 북파 … 98년 발각돼 처형”

중앙일보 2012.02.06 01:28 종합 10면 지면보기
1·21사태에 대해 새로운 증언을 내놓은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홍은택(가명 왼쪽)씨가 지난달 31일 경기도 남양주의 성락교회에서 김신조씨와 대화를 나눴다. [최정동 기자]


‘1968년 1·21사태 때 청와대 습격조는 31명인가 33명인가’. 사태 발생 44년 만에 새로운 증언이 나오면서 국정원이 관련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68년 당시 정부는 ‘청와대 습격에 나선 북한 124군 특수부대 게릴라 31명 중 김신조만 생포되고 30명은 사살됐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31명이 아닌 33명이 침투했고 ▶그중 두 명이 ‘목 자르기 협박’ 끝에 남한 간첩이 됐고 ▶이들은 ‘인민군 최고 지위로 출세하라’는 지령을 받고 돌아갔으며 ▶이후 각각 인민군 상장(중장)과 중장(소장)으로 진급했지만 98년 신분이 드러나 사형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북 상좌 출신 탈북자 주장



1968년 1월 25일 게릴라 시신 공개 때 다른 시체와 달리 한 시신은 머리 부분이 둘둘 만 헝겊으로 돼 있다(점선). 당시 언론들은 이를 ‘머리 없는 시체’로 보도했다.
 124군 부대 후신인 711부대의 8대대 출신 상좌(대령)급 탈북자 홍은택(57·가명)씨는 “70년대에 입대한 8대대에서 ‘습격조 33명, 2명 탈출’로 교육받았고 대대 전투기록장에도 2페이지에 걸쳐 이렇게 기록돼 있다”며 “두 명은 우명훈과 8대대 대대장인 임태영”이라고 말했다. 711여단 7대대에 73년 입대한 탈북자 최호준(56)씨도 “신병 교육 때 대대 교육 중대장이 ‘33명이 청와대 100m 앞까지 들어갔다가 김신조가 변절해 다 잡혔는데 임과 우 둘이 살아 돌아왔다’고 말했다”고 했다. 68년 당시 김신조 조사 책임자였던 백동림(당시 대위)씨도 “기억하기론 33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신조씨는 통화에서 “당시 정찰국장 김정태 지시로 31명이 꾸려져 함께 탁상훈련도 했고 함께 침투했다”고 말했다.



 탈출한 임과 우는 인민군 영웅이 됐으며 78년 여단 참모장으로 간 임은 90년대 초 경보병 훈련지도총국장(별 셋)이 됐고 우는 총참모부 2전투훈련국장(별 둘)이 됐다. 그런데 98년 간첩 혐의로 체포돼 10월 사형됐다. 홍씨는 보위부에서 임태영을 취조했다는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를 전했다.



 “임과 우 등 후방조 3명은 잡혀 전향 요구를 받았는데 거부하자 작두로 조장의 목을 잘랐다. 피 뿜는 몸은 펄떡거리고 목은 퉁퉁 튀고… 정신이 나간 임과 우는 ‘대한민국에 충성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인민군 최고 자리로 오르라’는 지령을 받았다. 남측은 공포를 쏘며 쫓아 북으로 보냈다.”



 ‘잘린 목’에 대한 기록은 중앙일보 68년 1월 26일자 3면과 당시 다른 신문의 ‘목 없는 게릴라 시체 1구’ 보도가 있다. 또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의 68년 1월 25일 사진 ‘CET0031039’의 둘둘 말린 헝겊 더미로 얼굴이 대체된 게릴라 시체와 바닥에 놓인 잘린 머리를 보여주는 ‘CET0031040’이 있다.



 두 명의 출세에 남한 지령과 지원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간첩 공작’이 탄로난 데 대해 홍씨는 “98년 이 건을 취조한 사람들은 ‘남조선 김대중 정부에서 자료가 올라왔다’고 말했다”며 “이 사태로 장성 100여 명, 대령 50여 명, 사회안전부·당의 고위급 100여 명이 체포돼 대개 사형됐다”고 했다.



 해직 국정원 직원 모임인 국사모의 대표이자 국정원 출신인 송영인씨는 “98년 4월 대북 정보기관에서 3500여 명의 직원이 강제 해직된 지 6개월여 만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게 놀랍다”며 “국정원은 1·21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상세 기사는 중앙SUNDAY 2월 5~6일자 참조).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