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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대동사회 (1)

중앙일보 2012.02.06 00:02 종합 37면 지면보기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선조 때의 선비 정여립(鄭汝立)은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도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낙향해서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혼정편록(混定編錄)』에서 “정여립은 전주·태인·금구(金溝) 등 인근 고을의 여러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까지 상하를 통해서 계를 만들어 대동계(大同契)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대동계는 매월 15일에 모여 활을 쏘면서 “육예(六藝)는 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육예에는 예(禮), 악(樂), 서(書), 수(數)와 함께 말이나 전차를 모는 어(御)와 활쏘기인 사(射)도 들어간다. 임란(壬亂) 5년 전인 선조 20년(1587) 왜구가 습격하자 전주 부윤(府尹) 남언경(南彦經)은 정여립의 도움을 청했는데 『혼정편록』은 “(정여립이)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대가 다 모여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다”면서 왜적을 물리친 후 정여립이 “훗날 오늘 같은 변고가 있으면 각각 부대를 이끌고 한 시에 도착하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대동계는 지방관의 요청으로 왜구를 격퇴했던 공개된 조직이었으나 2년 후인 선조 22년(1589) 반대당파에 의해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도구로 악용되었다. 대동계가 역모의 결정적 증거로 사용되었으므로 이후 대동(大同)이란 말은 금기가 될 법한데도 그렇지 않았다. 대동이란 용어는 정여립 사형 20여 년 후인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동법(大同法)이란 세법으로 다시 살아났다.

 대동법은 국가·왕실에 바치는 각종 진상품(進上品)인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해서 내는 세법을 뜻한다. 과거의 공납은 부자와 빈자의 구분 없이 비슷한 금액이 가호(家戶)마다 부과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대동법은 농토(農土)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부과했으므로 조세정의에 가까웠는데 그 시행 관청이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가난한 백성들이 환영한 세법이었다.

 정여립은 왜 대동이란 용어를 썼을까? 대동(大同)은 동양의 개혁 정치가들이 지향했던 이상사회였다. 동양 사회는 대동(大同)→소강(小康)→난세(亂世)의 순으로 분류된다. 중국 공산당은 2003년 당시를 소강(小康)사회로 평가하면서 앞으로는 대동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진로를 동양 고전에서 찾았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도 미래 방향을 둘러싼 진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동양 고전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하지 않는다. 대동, 소강, 난세의 편린이나마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진로에 대해 조금은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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