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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32) 은행 구조조정 <5> 합병을 권하다

중앙일보 2012.02.06 00:00 경제 2면 지면보기
1998년 6월 초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그림)는 상업·한일·조흥은행장을 불러 합병을 권한다. 같은 달 중순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6개 은행장만 만찬에 초대한 것도 나머지 은행에 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1998년 6월 20일, 신라호텔 일식집. 내가 들어서자 은행장들이 일어섰다. 나는 한 명 한 명 악수를 청했다. 류시열 제일은행장, 신복영 서울은행장, 홍세표 외환은행장, 라응찬 신한은행장, 김진만 한미은행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모두 표정이 밝다. 몇몇은 상기된 미소까지 띠고 있다.

6개 은행장 불러 만찬 … ‘나머지는 살길 찾아라’ 메시지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며 식사를 시작했다.



 “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마지막 단계만 잘 끝내면 신용 경색이 풀릴 겁니다.”



 행장들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사는구나.’



 초대된 6개 은행장. 공통점을 굳이 꼽으라면 ‘이미 운명이 결정된 은행’이라는 것이다. 서울·제일은 해외매각이 결정돼 있었다. 외환은행을 제외하면 모두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8% 이상이다. 일단 부실 딱지는 면했다. 그렇다고 우량하지는 않다. 금융감독위원회는 ‘그나마 자생력이 있다’고 판단했다.(외환은행은 독일 코메르츠 은행에서 외자를 유치해 온 게 높이 평가됐다. 이게 대단한 착오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슬아슬하지만 살아남을 은행’인 셈이다. 가계 대출 위주였던 국민·주택은행을 제외하면 당시 국내에 ‘안전하다’고 할 만한 은행이 없었다. 기업이 휘청이는데 돈을 빌려준 은행이 멀쩡할 수는 없다.



 이 자리에선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른 자리가 아니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만든 자리다. 이들 은행이 아니라 다른 은행에 던지는 메시지다. 여럿이 모인 자리,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금감위원장이 이런 이런 은행장들을 불러 저녁을 먹었다더라”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 뒤에 숨은 내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국민·주택은행을 빼면 괜찮은 은행은 이들 여섯 정도다. 나머지는 불안하다. 살길을 찾아라.”



 메시지는 정확히 전달됐다. 상업·한일·조흥은행이 몸이 달았다. 부실 딱지가 붙었지만 퇴출은 되지 않을 것 같은, 역시 아슬아슬한 은행들이다. ‘보아하니 살아남을 은행들을 부른 것 같다. 왜 우리는 안 불렀을까.’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만나 한탄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는 막장 인생이다. 뭐라도 답을 찾아보자”며 발을 동동 굴렀다는 것이다.



 이미 나는 한 차례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를 통해서다. 6월 초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과 셋이 모인 자리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경쟁력 있는 은행 중심으로 합병을 시켜야겠습니다. 우리나라도 리딩뱅크가 필요합니다.” 전 총재가 “내가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그는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 그리고 위성복 조흥은행장을 한꺼번에 불렀다. 그리고 “증자를 못하면 합병을 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문제는 구체적인 지침도 비전도 없었다는 거다. 시장에 일대 혼란이 일었다. “조흥·상업·한일 셋이 합병한다더라.”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나는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이던 1976년, 서울·신탁은행의 합병을 주도해본 적이 있다. 은행 합병은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다. 세 개 은행을 합병하면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온다.



 ‘안 되겠다.’ 내가 나섰다. 7월 중순, 나는 배찬병 상업은행장을 여의도 금감위원장실로 불렀다.



 “뭐 뾰족한 수가 있으십니까.”



 “…막막합니다. 외자 도입이 너무 어렵습니다.”



 상업은행이 리먼 브러더스와 외자 도입 협상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 때였다. 순탄치 않은 모양이었다. 그럴 것이, 그때는 한국 시장에 돈을 넣겠다는 해외 투자가가 더 이상해 보일 때였다. 정상적인 자본을 유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꼭 외자 도입만 방법입니까. 증자가 어려우면 합병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배찬병의 눈이 빛났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도…” 배찬병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한일은행 이관우 행장과 합병 얘기를 꺼내보긴 했는데….”



 “한일이면 기업 여신이 많고, 상업하고 어울리네요. 정부가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나는 며칠 뒤 이관우 한일은행장도 불러 같은 취지의 얘기를 꺼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배찬병·이관우가 연세대 동문이라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둘을 부른 뒤 불과 열흘쯤 지났을까. 배찬병과 이관우가 함께 내 방을 찾았다.



등장인물

▶고(故)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경제기획원·교통부 등에서 근무. 충남대 교수 출신의 경제 관료 겸 경제학자. 98년부터 4년간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으며 98년 은행 구조조정 당시 은행 합병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4년 6월, 6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실기했다면 파산했을 수도 … 합병 발표문 지금도 외워

배찬병 당시 상업은행장




1998년 7월 말 한일은행과의 합병을 전격 발표한 배찬병(75·사진) 당시 상업은행장. 그는 합병 발표 보도자료의 문구를 지금까지 외고 있었다. “그 중요한 순간을 어떻게 잊겠느냐”고 했다.



 -합병 말고 방법이 없었나.





 “조건부 승인을 받고 마음이 급했다. 처음엔 외자 유치를 조금만 하면 독자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점 건물 팔고 해외 사업장도 정리하려 했다. 어느 은행장이든 살 수 있다면야 독자 생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물 매각이나 외자 유치나 모두 쉽지 않았다.”



 -합병을 결심한 계기는.



 “ 7월 중순에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이 불러 ‘합병하는 방법도 있다’ 하더라. 민감한 때라 정부가 ‘이렇게 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방향을 제시한 거라 봤다.”



 -보름도 안 돼 합병을 발표했는데 .



 “어차피 판단을 내린 바에야 빠를수록 좋았다. 시간 끌수록 마음만 아프고 반발만 생긴다. 실기(失機)했다간 파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때 판단이 맞았다고 본다.”



 -합병 뒤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이 한동안 어려웠는데.



 “합병 직후엔 공적 자금 덕분에 은행이 안정됐었다. 그런데 계속 부실 기업이 나와 은행이 흔들린 거다. 지금 우리은행은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은행이다. 이후 경영진이 정말 잘해 줬다. 민영화가 안 돼서 안타까울 뿐이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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