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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지게임과 일본 국채

중앙선데이 2012.02.05 01:58 256호 29면 지면보기
빚이 불어나는 나라(Land of the Rising Debt). 몇 년 전부터 종종 쓰이는 일본의 별명이다. ‘해 뜨는 나라(Land of the Rising Sun)’가 그렇게도 불리는 것은 엄청난 나랏빚 때문이다.

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올해 4월부터 시작될 2012 일반회계 예산 90조 엔(약 1320조원) 가운데 세수는 47%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채권 발행으로 충당한다. 나라 살림의 절반을 빚으로 꾸리는 것이다. 국채 금리가 연 1% 안팎인 데도 무려 세수의 26%(11조 엔) 이상을 이자 갚는 데 쓴다. 이 비율은 해마다 상승했다. 빚이 빚을 부르는 ‘빚의 덫(debt trap)’에 빠진 것이다. 그렇게 쌓인 나랏빚은 대략 1000조 엔(약 1경5000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0%를 웃돈다.

그런데도 일본이 무사한 것은 외국에서 갖다 쓴 빚이 적고, 일본 국민과 기업이 국채를 계속 사주고 있어서다. ‘잃어버린 20년’이라지만 일본 정부로선 그간 정말 선방했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20년 새 실업률 최고치는 5.5%였다. 지금은 4%대로 떨어져 미국의 절반 수준이다. 20년간 쌓은 경상흑자가 2000억 달러를 넘는다. 적자 수렁에 빠진 미국과는 격이 다르다. 경제성장률도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보면 연평균 0.8%다. 미국의 1%와 큰 차이가 없다. 엔화 가치는 87% 높아진 반면 달러 가치는 94%나 추락했다. 일본인의 수명은 1989년 78.8세에서 2009년 83세로 길어졌다. 미국인보다 4.8년 더 산다. 잃은 것만 있는 20년 성적표는 아니다.

그렇다고 빚이 이렇게 불어나도 괜찮을까. 이런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게 위험신호다.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도쿄UFJ는 국채 값이 급락할 가능성에 대비해 비상계획을 마련했다고 한다. 일본 유력지가 1면 톱으로 전한 소식이다. 시장에서 비관론도 늘고 있다. 부도 위험만 따로 떼어 사고파는 신용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해 3·11 동일본 대지진 때보다 더 높아졌다. 헤지펀드 공격설도 제기된다.

금융위기 때 큰돈을 번 헤지펀드 매니저 카일 배스는 일본 국채 시장을 버나드 메이도프의 금융피라미드(폰지게임) 사기에 비유한다. 국채를 사려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이 많아지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경고다. 나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으면 버티지만 그게 역전되는 순간 무너지는 것이 금융피라미드다.
과거 일본 국채 값이 떨어지는 쪽에 돈을 건 사람들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31년 만에 무역수지 적자를 내고, 세금을 내야 할 일본 기업들이 줄줄이 적자를 내는 상황에서 일본 국채를 바라보는 시장의 눈길은 달라지고 있다. 일본 정부나 정치권이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기도 힘들다. 고작 세금을 조금 더 걷어보자는 정도다. 일본 정부야말로 저금리를 가장 오래, 가장 달콤하게 즐긴 나머지 정작 그 해독을 잊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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