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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중앙일보 2012.01.30 00:00 경제 12면 지면보기
최선욱
경제부문 기자
범죄자가 자수했다는 이유로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범죄 수익은 고스란히 챙겨갈 때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최근 제품 값을 짜고 올린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됐지만 미리 자진 신고했다는 이유로 수백억원의 과징금을 면제받은 삼성·LG전자 얘기다.



 이 같은 리니언시(leniency) 제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란 비판이 거세지자 공정위는 최근 소비자소송 지원이라는 새로운 칼을 꺼냈다. 담합이 적발된 기업에 소비자가 집단소송을 걸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개별 소비자 입장에선 담합 피해는 소액인 반면 변호사 선임료 등 소송비는 훨씬 많이 든다. 소송비를 낮추려면 소비자가 소송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 공정위는 소비자를 모으기 위한 공고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민사소송에 정부가 왜 끼어드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대기업 앞에 한없이 무력한 개별 소비자 입장을 생각할 때 충분히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다. 김동수 공정위원장이 말했던 공정위의 ‘따뜻한 균형추’ 역할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아쉽게도 정책 방향이 옳다고 무조건 박수 칠 일은 아니다. 리니언시와 소송지원 제도가 충돌할 수 있어서다. 이유는 이렇다. 담합을 자진 신고하는 기업은 자기에게 불리한 증거까지 공정위에 제출하게 마련이다. 과징금을 깎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업은 “감면된 과징금보다 더 큰 손해배상금을 물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부담을 느끼고 있다.



 소송 진행 과정에서 기업이 당초 자진 제출했던 세부자료가 공개될 경우 체감 위험도는 더 커진다. 문제는 앞으로 기업이 이 같은 위험을 의식해 자진 신고를 꺼리거나 조사 협조를 게을리할 때 공정위가 쓸 수 있는 유인책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공정위는 미국과 달리 담합 조사에서 강제력을 행사할 권한이 없다. 결국 담합은 담합대로 적발이 어려워지고 소비자 피해를 구제할 가능성도 희박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때문에 ▶담합 자진 신고 기업의 손해배상금 상한선을 두거나 ▶제출 자료에 대한 당국의 비밀보호 의무를 두는 등 국내 사정에 맞는 보완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세심한 정책 보완이 없으면 소비자 피해구제라는 좋은 취지를 제대로 못 살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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