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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我記宅處’] 세 나라 온천서 느낀 화(和)·화(華)·화(禍)

중앙일보 2012.01.28 01:01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겨울, 일본 온천의 치명적 매력



 일본의 온천을 처음으로 가본 게 딱 20년 전이다. 사업으로 한국을 오가는 한 재일동포가 건축설계를 의뢰하면서 일본에 있는 유사한 시설을 참고하도록 나를 초청했을 때였다. 때는 한겨울. 사흘간의 빡빡한 일정을 마친 후에 후지산 밑 하코네 온천을 가기로 했다. 예약이 없었지만, 그곳의 온천 안내소에 가장 오래된 온천여관을 물어 한 곳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고 잔설이 있는 산속 온천마을 도로의 맨 위로 차를 몰아 한 낡은 여관에 도착했다. 이미 연락을 받고 밖에서 기다리던 나이 지긋한 여주인은 허름하지만 기품 있는 여관을 설명하며 400년 되었다고 했다. 방은 불과 3개뿐이었는데, 낡은 목조 집의 마루는 밟는 대로 오래된 나무 소리를 냈다. 적당히 짐을 풀고 욕의로 갈아입은 후 욕장을 찾았다. 삐걱거리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선 작은 욕장 안은 더운 유황냄새가 농밀했다. 구석의 노송나무 욕조 언저리에 덕지덕지 앉은 온천물의 찌꺼기는 시간의 겹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어붙은 육신을 담그고 더운 김 속에 정신을 맡기니 내 곤고한 영육은 400년의 기억을 타고 사라지고, 데운 정종과 정갈한 식사는 허물어진 몸속으로 꿈결처럼 들어갔다. 한번 더 유황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 샛노란 다다미 위 푹신한 이불 속에 누웠는데, 내 고질적 불면마저 그 호사를 당할 길 없었다.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몇 시간을 내리 잤을까. 아침, 창호지를 투과하며 밀려드는 빛에 몸을 일으켜 하얀 장지문을 밀었다. 아… 그 눈부심이란. 밤새 내린 눈으로 천지는 완벽히 순백이었다. 이런 지극한 아름다움… 그게 화(和)였다.



일본 하코네의 한 온천.
 나는 그 황홀한 첫 경험으로 바로 일본 온천의 예찬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갈 기회만 주어지면 일정 끝엔 온천을 찾았다. 사실, 건축의 본질적 요소인 공간에 대한 문제를 간과하고 껍데기 디자인에만 신경 쓰는 요즘의 그들 건축은 내 관심 밖이 되어 일본을 잘 가지 않게 된 지금에도, 일본 온천은 특히 겨울에 치명적 매력으로 나를 끌었다. 거기에는 치유와 함께 농도 짙은 사유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 피터 줌터의 ‘테르메 발스’



스위스의 발스라는 곳에 피터 줌터가 설계한 온천욕장 ‘테르메 발스(Therme Vals)’가 있다. 스위스 시골 구석에 자그마한 사무소를 가지고 있지만, 시류에 결코 영합하지 않는 그의 시적 건축은 수많은 사람을 순례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건축이 이 온천욕장인데, 도면으로만 봐도 그 공간의 깊이와 명민한 조직에 크게 감동받는다. 1999년 겨울, 내가 런던에서 객원교수로 머무르고 있을 때 여기를 혼자서 가보기로 했다. 스위스 동부의 도시 쿠르에서 일란츠라는 곳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다시 우편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니, 필경 오지에 있는 게 분명했다. 쿠르에서 탄 기차가 알프스에서 보덴호수로 흐르는 옥색빛 강물을 거스르며 달리는 내내, 주변 산세가 만들어내는 풍경에 넋을 놓고 만다. 그러나 그건 서주일 뿐이었다. 일란츠에서 우편버스를 타고 보니 이른 시간이라 승객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계곡 속 산허리를 감싸는 좁은 길을 도는데, 아아…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구비구비 펼쳐지고 있었다. 선경이고 비경이며 황홀경이 여기였다. 문득 나 혼자 갖는 이 지독한 행복에 죄스러움마저 느꼈다. 이윽고 도착한 온천욕장, 이미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된 내 눈에는 그 건축마저 풍경이었다. 땅을 슬쩍 들고 나온 듯한 이 건축의 내부는 서로 다른 온천욕의 기능을 가진 크고 작은 공간들이 마치 작은 마을처럼 형성돼 있었다. 그 속에서 머물기도 하고 사이를 거닐기도 하다가 벗은 몸으로 테라스에 나갔는데, 건너편 산자락 풍경이 갑자기 밀려와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마침내 나도 그 일부가 되어 풍경으로 변했다. 이 빛나는 아름다움, 화(華)라는 게 이런 것일 게다.



한국의 아름다운 설산, 그러나 …



 지난해 말 겨울에는 그래도 온천이 제일이라며 몇 사람에 이끌려 동해안의 한 온천호텔에 갔다. 그 전날 마침 폭설이 내린 탓에, 가는 길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우리 산들이 빚어내는 실루엣의 부드럽고 깊은 맛을 격한 알프스와 불끈한 후지산이 감당할 도리가 없다. 물 맛은 또 얼마나 좋은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행으로는 최고라고 하며 가는 내내 들떴다. 그런데… 온천호텔이 있는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설산의 풍경을 망쳐놓는 간판들의 악다구니와 그 뒤로 느닷없고 무례한 형태의 건물들…. 이윽고 국적 불명의 모습을 한 호텔로 들어가자 어둡고 지저분한 내부와 사물들…. 옷 갈아입은 후 욕장에 이르니 분별없는 탈의실과 어지러운 도구들, 그리고 수용소 같은 침실, 심지어 무슨 맛인지 모를 아침식사까지…. 연민의 여유마저 없었다. 하코네와 발스의 아름다운 기억이 아스라히 떠오르면서 절망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화(禍)였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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