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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다윈의 정원’] 전문가 아이디어·지식은 공짜 ?

중앙일보 2012.01.28 01:00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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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학창시절 복사·제본의 기억



 버릴 것인가 챙길 것인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사 때마다 늘 고민이다. 서재가 더 작아지기라도 하면 그 괴로움은 배가된다.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 3’에서 장난감 우디와 버즈가 대학생이 된 앤디의 선택을 받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듯이, 마치 우리 책들도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독서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우성에 귀를 막고 그들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리어카 한가득 책을 싣고 쓰레기장으로 향하던 내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을 쏟아 놓고 되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족히 기백만원어치의 책들을 그냥 버렸다는 아쉬움 때문은 아니었다. 이사가 계기였지만 단지 공간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지식의 바다에 푹 빠져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던 대학원 시절, 나는 값도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 외국의 전문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복사·제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똑같은 색깔의 표지를 한 가짜 책들이 책장을 가득 메운 광경을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비록 외국 학자들이 쓴 책이지만, 그들이 어렵게 공부해서 만든 지식을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제본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의 리어카 사건은 내 공부의 역사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사건이다. 덕분에 나는 어느덧 지식 복제사가 아닌 생산자의 길에 들어섰고, “내 책을 사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내 서재에는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총천연색 책들이 내 뇌를 유혹하고 있다. 그때 그 리어카 덕분이리라.



아쉬울 땐 전문가 찾더니



 지식을 홀대하다 겪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했으니 억울한 이야기도 하나 해보련다. 수년 전 대학원 시절, 모 방송국에서 ‘OO’이라는 주제의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담당 PD가 찾아와 문의를 했고, 나는 두세 시간 동안 그 주제에 대한 내 생각과 함께 내 나름의 기획까지 이야기하게 됐다. 그분은 많이 배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많이 얻었다며 돌아갔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그 PD에게서 e-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다큐가 내일 방송되니 봐주시라”는 메시지였다.



 재밌고 참신한 접근이었고, 내 아이디어들이 곳곳에 배어 있어서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이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나는 내심 어딘가에 내 이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없었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정도의 기여였다면 ‘도움을 주신 분들’ 난에는 분명히 이름이 올라왔어야 했다. 억울해 항의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깜빡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저 전날에 e-메일 공지를 받은 것으로 위로를 받기로 했다.



 내가 한갓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전문가가 제공하는 아이디어와 지식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방송·언론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쉬울 때는 언제든 전화하거나 찾아와 전문가들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으며 지식을 얻어가지만, 출처와 고마움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이상할 정도로 인색하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면 전문가는 자신의 지식에 대한 크레디트를 못 받으면서까지 시간을 내줄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되어 소통을 꺼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국 고급 지식은 유통되기 힘들다.



창의적 지식 제 값은 어떻게 ?



 지난 18일, 이른바 ‘집단 지성’으로 운영되고 있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미국 의회가 표결 준비 중인 온라인 규제 강화 법안에 반발하는 뜻으로 만 하루 동안 영문 사이트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 법안의 취지는 저작권을 침해하는 자료들에 대한 접근을 막겠다는 것인데, 위키피디아뿐 아니라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기반 기업들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물론 이번 사건은 지식의 소통 문제뿐 아니라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인터넷 업계와 미디어산업 간의 이익 다툼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사건이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의 제 값과 공정한 유통의 문제,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창의적 지식’에 대한 진지한 토론의 자료로 활용되면 좋겠다. 아직도 남들이 힘들게 생산한 지식을 아무렇지 않게 베껴 쓰는 수준의 문화에서 지식을 집단 창작하고 공짜로 유통시키며 그 다음 단계의 창의적 지식을 논하는 문화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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