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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20) 김우중과 나 <4> 함께한 세상 탐사

중앙일보 2012.01.17 00:00 종합 10면 지면보기
1982년 가을부터 이헌재는 김우중 회장과 함께 대우의 세계 경영 현장을 누빈다. 첫 출장지였던 아프리카 수단에서 그는 건설 대금을 면화로 받아 현금화하는 김 회장의 수완에 감탄한다. 사진은 1980년 김우중 회장(왼쪽)이 수단 니메이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수단의 수도 하르툼. 11월도 후텁지근하다. 이따금 모래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대우가 지은 프랜드십 호텔 꼭대기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짐을 풀었다. 객실이 150개가 넘는, 수단에서 가장 큰 호텔 중 하나였다. 아프리카에서도 비즈니스가 가능하다는 게 내게는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김우중, 오지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대우 전략담당 상무’로 세계경영 1년 반 둘러보다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이야. 알고 보면 자원도 풍부하고 개발 가능성이 많지.”



 “당장 투자 자금을 회수할 방법이 마땅치 않을 텐데요.”



 “돈을 받는 게 아니야.”



 “그럼 뭘 받습니까?”



 “면화로 받지. 수단 면화는 세계 최고야.”



 이른바 삼각 무역이다. 사업의 대가로 물건을 받고, 그걸 다시 다른 곳에 팔아 돈을 번다는 것이다. ‘롱 파이버(Long fiber)’라고 불리는 수단 면화가 세계 최고라는 것, 미국의 ‘숏 파이버(Short fiber)’로는 고급 면제품을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대우는 수단의 항구 포트수단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자동차 타이어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뿐이랴. 리비아에서는 건설 공사 대금을 원유로 받기도 했다.



 ‘이렇게도 세상 일을 처리할 수 있구나…’.



 김우중 회장을 따라 세계의 사업 현장을 돌아다닌 1년 반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김 회장은 내게 세상을 보는 렌즈였다. 나는 그를 통해 기업의 속내를 봤고, 또 다른 세상을 알았다. 그게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말이다.



 1982년 11월, 그와 함께 떠난 첫 행선지가 수단이었다. “세상을 함께 보고 싶다”고 전화를 건 지 불과 열흘 만에 그의 해외 출장에 따라 나서게 된 것이다. 직함은 ‘㈜대우 전략기획실 전략 담당 상무’. 김 회장의 수행 비서 윤태훈이 함께 다녔다.



 그야말로 세계를 누볐다. 김 회장이 가는 나라는 거의 다 따라다녔다. 이란·인도·파키스탄·리비아·나이지리아…. 김 회장은 사업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직접 갔다. 대우의 세계 경영 현장을 내 눈으로 직접 둘러본 셈이다. 언제나 가방 하나만 달랑 챙겨 들고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었다. 손가방 속에는 양복 한 벌, 셔츠 한 장, 속옷 두 장, 그리고 자료. 들어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였다. 비행기를 탈 때 짐을 부쳐본 적이 없었다. 10분 전 탑승해 내리자마자 바로 현장으로 가기 일쑤였다.



 현장 상황은 수시로 변한다. 오지에선 비행 스케줄이란 것도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이란에서는 혁명수비대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일주일간 옴짝달싹 못하고 대우 숙소에 붙잡혀 있던 적도 있었다.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대우의 시스템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건설 현장에서 처음으로 관리와 자재, 건설을 분리한 회사가 대우였다. 당시는 우리 건설사들이 막 해외에 나가기 시작할 때였다. 대개 하나의 현장은 프로젝트 단위로 함께 움직였다. 인력·자재· 건설이 한 현장에서 굴러가니 회계처리며 인사며 애매한 게 많았다. 대우는 유일하게 설계와 자재 관리, 건설 등을 분리해 운영했다. 요즘은 다 그렇게 한다. 성패를 떠나 참 현대적 방법이라 신선했다.



 사람 관리도 특별한 데가 있었다. 대우 직원들은 명문대 출신이 비교적 많았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자잘한 사고는 쳐도 큰 사고는 치지 않는다”는 게 김 회장의 지론이었다.



 그 엘리트들이 아프리카·중동의 오지에서 묵묵히 일했다. 어떻게 그랬을까. 김 회장은 사람을 심하다 싶게 챙겼다. 오지에서 고생하는 간부의 가족들을 “자녀 교육을 시키라”며 영국이나 스위스에 보내주는 식이었다. 한편으론 인간적이지만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요즘 기업들이 하는 해외 순환근무에 비하면 비용도 많이 들고 자칫 직원들이 도덕적으로 둔감해질 수 있었다. 오지 근무자들은 “여기서 몇 년 고생하면 가족의 평생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몸을 사리지 않고 오지로 뛰어들곤 했다.



 최근 김 회장이 한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해외에서 빡세게 5년만 굴러보라” “걱정하거나 두려워 말고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젊은이들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그다운 말이다. 세상을 누비면서 본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디 두려움뿐이랴. 한계도 없고 사고방식도 독특했다. 83년 8월 우리는 함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 그의 반응을 보고 분명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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